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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유가와 세계경제

저유가 속 산업별 기상도 | 정유·조선·건설 울고 유화 ‘불안한 미소’ 원가 낮아도 수요 감소하면 말짱 도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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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인 저유가에 국내 산업계는 희비가 엇갈린다. 정유·조선·건설 등은 저유가로 관련 수요·발주가 감소해 경영난을 겪고 있다. 석유화학·항공·해운 등은 이론적으로는 생산 원자재인 석유 가격 하락으로 원가 절감 효과가 기대되지만, 코로나19 사태라는 미증유의 경제위기로 정상적인 영업마저 어려운 상황이다.

▶정유·조선·건설 ‘울상’

▷정제마진 하락에 대규모 적자 우려

업계에 따르면 4월 첫째 주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배럴당 -1.4달러를 기록했다. 지난 3월 셋째 주 배럴당 -1.9달러를 기록한 후 3주 연속 마이너스다.

정제마진은 정유업계 수익을 좌우하는 핵심 지표다. 국제유가 급락으로 석유 제품 가격이 하락하면 정제마진도 감소한다. 짧은 시간에 유가가 떨어지면 정유사가 과거 높은 가격에 구매한 원유 재고의 평가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배럴당 4~5달러가 손익분기점인데 정제마진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것은 원유 가격보다 휘발윳값이 더 싸졌다는 의미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하루 생산되는 석유 중 약 500만배럴은 생산 비용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고 밝혔다. 팔면 팔수록 밑지는 장사인 셈이다. 당장 국내 정유사들이 직격탄을 맞게 됐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올 1분기 SK이노베이션 영업손실이 많게는 1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정유업계는 부랴부랴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울산 정유공장 가동률을 10~15% 낮췄다.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 등은 정기보수 시기를 앞당기고 재고를 줄이겠다는 방침이다. 업계 관계자는 “휘발유 수요의 99%는 자동차 등 개인 이동용인데 사회적 거리 두기가 지속되며 수요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지 않는 한 단기간 내 업황 개선은 어려울 것 같다”고 토로했다.

조선업계도 저유가가 반갑지 않다. 저유가로 기름이 넘쳐나면서 석유시추선 등 설비투자나 관련 발주량이 급감한 때문이다. 조선해운시황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세계 선박 발주량은 236만CGT(표준화물선환산t수)로 지난해 1분기(820만CGT) 대비 71.2% 급감했다. 특히 해저에 매장된 석유, 가스 등을 탐사·시추·발굴·생산하는 해양플랜트 발주량은 ‘제로’에 가깝다.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국내 건설사 해외 수주의 60%를 차지하는 중동 산유국 플랜트 공사도 취소되거나 발주가 잇따라 연기되고 있다.

중동 수주 물량이 많았던 건설업계도 발을 동동 구른다. 원유 수요가 줄자 주요 산유국이 발주 계획을 순연하거나 취소하는 사태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최근 4조원대 플랜트 입찰 기일을 연기하기도 했다. 해외 건설 수주액은 1월 56억4603만달러에서 2월 37억2232만달러, 3월 18억2989만달러로 급감했다.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나라에서 입국 금지가 걸린 탓에 신규 수주는커녕 기술진도 못 보내 현지 공사가 차질을 빚고 있다”고 우려했다.

▶저유가 수혜주? 수요 회복이 관건

▷‘보복적 소비’ 시 원유운반선·SUV 기대

저유가로 수혜를 입는 산업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전문가들은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한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 경제가 위축되며 관련 수요가 급감, 수혜주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때문이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전에는 석유를 원료로 쓰는 항공, 해운, 석유화학, 자동차 등이 대표적인 저유가 수혜주로 꼽혔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전반적인 경제활동이 위축된 지금은 수혜주라고 말하기 어렵게 됐다”고 진단했다. 대한항공의 경우 화물 운송이 전체 매출의 약 20%를 차지해 일부 기름값 절감 효과는 기대되지만, 주 사업인 여객 운송이 90% 이상 급감해 타격이 더 크다.

상황이 이렇자 저유가 수혜주는 한마디로 ‘석유를 원료로 쓰면서 수요가 유지되거나 감소폭이 적은 산업’으로 정리된다.

석유화학 업계가 대표적이다. 석유화학 제품을 만드는 주요 원재료로서 ‘석유화학 산업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 가격은 급락했지만 제품 수요는 상대적으로 덜 감소해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다. 윤재성 하나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석유화학 업종은 플라스틱, 비닐 등 필수 소비재가 많아 경기 위축에도 수요 감소폭은 적은 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택배 수요가 늘며 택배용 포장재 등은 오히려 수요 증가도 기대해볼 수 있다. 최근 중국의 공장 가동률이 정상화되는 등 일부 지역에서 코로나19 사태가 진정 국면에 다다른 것으로 보이는 점도 긍정적인 요인이다”라고 말했다. 단, 일각에서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딜로이트리서치는 보고서에서 “석유화학 수출 비중 중 절반 정도가 중국으로 향하는 물량인데 최근 중국 내 수요가 급감했다. 원재료인 유가 하락이 수익성 개선에 기여할 수는 있겠으나 석유화학 업황이 살아나려면 중국 수요 회복이 관건이다”라고 짚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수요가 다소나마 회복된다면 ‘보복적 소비(억눌렸던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 관련 업종이 가장 먼저 수혜를 입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달석 선임연구위원은 “화물차에 쓰이는 경유는 수요가 경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름이다. 경기가 회복돼 물동량이 많아지면 수요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승용차에 많이 쓰이는 휘발유도 이동 수요가 많아지면 수혜를 입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조선·해운업계에서는 원유운반선(VLCC)의 건조와 운항이 급증할 수 있다. 실제 대우조선해양은 최근 초대형 원유운반선 1척을 팬오션으로부터 수주했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SUV 등 대형 차량의 판매 증가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저유가가 지속될 경우 연비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형 차량을 운행하는 비용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김준성 메리츠종금증권 애널리스트는 “원유 가격이 떨어지면 기름값 부담이 줄어 사람들이 차를 더 많이 운행하게 된다. 다만 이런 가정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도 유가가 낮게 유지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유가, 가계에는 축복일까

실질소득 늘지만 ‘코로나 디플레이션’ 우려

일반적으로 저유가는 가계에 축복으로 여겨진다. 가계소비에 부담을 주는 물가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기름값이 하락하면 기업 생산 비용이 하락해 제품 가격이 떨어진다. 휘발유·경유 가격도 내려가니 가계 입장에서는 이득이 많다.

물가 하락은 곧 실질소득이 증가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개인이 소비를 늘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셈이다. 가계가 소비를 늘리면 적절한 인플레이션과 함께 내수 경기가 살아나 경제 전체에 활력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저유가가 어떤 상황에서나 축복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요건이 바뀌면 축복에서 저주로 돌아선다. 호황기에 수요가 건재한 조건에서 공급 과다로 발생한 저유가는 호재로 작용한다. 경기 침체기는 반대다. 저유가가 오히려 악재로 작용한다. 저물가 상황을 가속시켜 경제 침체를 앞당긴다. 저성장·저물가로 경제가 ‘디플레이션’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다.

디플레이션 현상이 계속되면 가계 고용을 담당하는 기업이 치명타를 입는다. 실적이 나빠진 기업이 구조조정을 통해 인력을 감축하면 실업자가 늘어난다. 실업자가 증가하면 가계소득은 줄어든다. 소득이 사라진 가계가 무너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영국 시장분석기관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저유가로 가계 실질소득이 늘어나면 소비 증가로 이어져야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당분간 소비가 늘어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노승욱·반진욱·박지영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54호 (2020.04.15~04.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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