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담임목사/분당우리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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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로 정상적인 종교활동이 멈춰선 지 벌써 한달 반이 되어간다. 고난의 시기를 이겨낼 정신적 위로와 격려의 말씀에 대한 간절함도 깊어지고 있다. 12일 분당우리교회 부활절 온라인 예배에서 이찬수 담임목사가 ‘절망과 회복의 갈림길’이라는 주제로 전한 설교 전문(全文)을 소개한다. <편집자>
절망과 회복의 갈림길
사도행전 1장3절, 열왕기하 4장18-20절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담임목사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18)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19)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20)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왕하4:18-20)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앞으로 우리 인간들의 삶에 많은 변화와 혼란을 가져다줄 것”이란 예측을 합니다. 심지어 “이제 인류는 코로나 바이러스 중심으로 ‘Before 코로나’와 ‘After 코로나’로 나뉠 것”이란 말까지 나옵니다. 사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인공지능 AI의 출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량 실직을 당하고, 갈등을 겪고, 인간의 존엄성이 초라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사건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저와 같은 목회자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주변의 목사님들 모두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데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성도들이 교회에 찾아오는 일을 어색해하지 않을까” 많이들 우려합니다. 사실 저도 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걱정이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글이 제 마음의 우려를 씻어주었습니다. 글쓴이는 오랜 만에 각 분야에서 직장 생활하는 동창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인공지능 AI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인공지능 AI는 절대 인간교사를 대체할 수 없다. AI가 기계적으로 수업을 할 수는 있겠지만, 아이들을 교실에 앉혀서 수업을 듣게 만드는 역할은 사람 교사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저는 마음에 확신을 가졌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더라도, 인간과 인간의 살갑고 따뜻한 정겨움을 대체할 수 없다면, 이 원리가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들어, ‘untact’라는 단어를 많이 듣습니다. ‘비대면’, ‘비접촉’이란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난 이후에도 비대면 또는 비접촉, 즉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지 않는 것이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제가 읽은 초등학교 교사의 글을 생각해 보니, 비대면이 트렌드가 되는 시대가 되면 오히려 대체할 수 없는 교회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만남의 목마름을 가질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가 중심을 세워 이런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교회를 더 찾게 만드는 열매를 가져다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교회를 나오지 못하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 지 한 달 반쯤 지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성도님이 우리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송림 중고등학교 앞을 지나가셨나 봅니다. 그런데 송림 중고등학교 앞을 지나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학교 앞을 지나가는데 왜 눈물이 핑 돌았을까요? 건물이 그리워서요? 아닙니다. 그곳에서 이루어졌던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 만남, 축복, 위로, 이런 것들이 떠올라서 눈물이 핑 돌았던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현대인들에게 안겨준 숙제를, 교회가 풀어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목마른 이 시대에, 교회가 그동안 익숙해져 왔던 모든 관행을 내려놓고, 어떠한 이해관계를 떠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사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활주일을 앞둔 지난 한 주 동안, 어떻게 하면 교회가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공헌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과 함께 성경 두 곳을 집중적으로 읽고 묵상하였는데요.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행적을 한마디로 요약해 놓은 말씀인 사도행전 1장 3절과 열왕기하 4장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시간 함께, 한국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하는 두 가지 대안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부활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 고난주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가상칠언, 즉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던지셨던 일곱 마디 말씀을 많이 묵상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한 마디가 마음에 많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저에게 감동을 가져다주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에 땀 흘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선포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으로 주님의 역할은 다 끝났다고 보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무려 40일을 이 땅에 더 머무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역할이 다 끝나셨음에도 바로 승천하지 않으시고 40일을 더 머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장 3절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그 다음을 보십시오.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이 말씀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제자들을 부활신앙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도우셨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가 능력의 사역들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를, 사도행전 2장에 나와 있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하심, 성령 충만 때문으로 이해합니다. 이 분석은 100% 옳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 주 이 말씀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보니, 사도행전 2장의 성령 충만이 있기 전, 사도행전 1장 3절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도하는 사건이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이 둘은 구분할 수 없는 한 사건이지만, 경험했던 사건의 순서로 보니, 또 다른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 이 시대와 민족을 살리는 능력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경험했던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보이는 은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한 감동으로 평생을 시대와 민족을 섬기는 사역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사도바울입니다. 저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이 가졌던 감동의 외침이, 마음에 얼마나 큰 울림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이 시간 고린도전서 15장 4절부터 천천히 읽어보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도바울의 감격을 느껴보십시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감동이 느껴지시나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여러분, 오늘 부활주일 예배는 어떤 면에서 우리가 일평생 드린 부활절 예배 중 가장 마음이 힘든 예배입니다. 예배당에 모이지도 못하고, 가정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정말 가슴 아픈 부활예배이지만, 저는 이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예배 가운데 저와 여러분을 만나주실 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라는 고백을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두 번째 대안은 ‘부활신앙으로 이 시대와 세상을 섬기자’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사도행전 1장과 더불어 함께 읽은 열왕기하 4장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호의를 베풀던 수넴 여인의 외아들이 갑자기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열왕기하 4장 18장 19절에 나옵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 다음 이어지는 20절 “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에 나오는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 이 말씀은, 고통을 호소하던 아들이 해가 지기 전에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18절의 “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뭘 의미할까요? 우리를 고통으로 몰고 가는 절망적인 일들은 예고하지도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런 초유의 가슴 아픈 사건은 예고 없이 갑자기 중국에서 일어난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미암은 것 아닙니까? 이 수넴 여인의 아들도 갑자기 죽었습니다. 저는 지난 한주 내내 19절에 나오는 그 아이의 절규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가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왜 지난 한 주 동안 제 머릿속에서 이 아이의 절규가 떠나지 않았을까요? 오늘 수많은 성도님들의 가정에 갑자기 찾아온 가슴 아픈 일들 때문에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고통하는 이 가슴 아픈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넴 여인의 아들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엘리사 선지자가 그 아들을 살려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를 통해서 그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죽은 아들을 살려주실 때 동원되는 두 인물입니다. 한 인물은 그 아들을 살려낸 엘리사 선지자이고 또 다른 한 인물은 그의 시종 게하시라는 인물입니다. 이 두 인물의 비교가 굉장히 흥미로운데,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살리는 엘리사, 살리지 못하는 게하시’입니다.
오늘 말씀속의 엘리사와 게하시를 분석해 보면 의미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첫 번째로, 두 인물을 이렇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냉정한 게하시 대 따뜻한 엘리사’. 열왕기하4장 27절입니다.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어떤 상황인지 다시 설명드리면, 이 수넴 여인은 갑자기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엄마가 뭐 정신이 있겠습니까? 너무나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서 그냥 정신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발을 막 어루만지며 그 발밑에 무릎을 꿇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찾아온 그 여인에 대하여 게하시가 참 냉정합니다.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즉 매달리는 여인을 만류합니다. 이런 게하시에 비해 엘리사의 따뜻한 마음을 한번 느껴보십시오. 27절 새번역입니다. “게하시가 그 여인을 떼어 놓으려고 다가갔으나, 하나님의 사람이 말리면서 말하였다. 그대로 두어라. 부인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쓰라린 괴로움이 있는 것 같구나.”
이 말씀을 묵상하며 ‘담임목사로서 나는 게하시의 모습을 보일 때가 참 많았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리사가 보여주는 그 따뜻한 마음 “그대로 두어라. 부인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쓰라린 괴로움이 있는 것 같구나.” 이것이 게하시와 엘리사의 첫 번째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로 이렇게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무성의한 게하시 대 정성을 다하는 엘리사’입니다. 죽은 아들을 살리는 과정에서도 이 두 사람의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열왕기하 4장 31절입니다.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자기가 섬기는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의 지팡이를 가지고 아이에 얼굴을 대보라고 했더니, 그냥 갖다 대보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비해 온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엘리사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여러분, 입술로 주님께 기도하던 엘리사의 마음에 그 여인의 아픔과 고통이 너무나 가슴깊이 다가왔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가 온 몸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마음을 감동시킨 엘리사의 모습은 35절에 있습니다.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여러분, 이 아이의 살이 따뜻해지고 있는 과정 중에, 엘리사는 완전히 회복이 될 때까지 다시 또 다시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정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하나님이 판단하실 부분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온 정성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엘리사의 그 모습을 보면서, 오늘 교회가 회복해야 될 부분이 바로 이 시대와 민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이런 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주 어느 칼럼에서, 유명한 신학자 N.T 라이트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한 글을 기고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통이라는 성경의 전통을 회복하는 일이다. 무슨 일을 설명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아니다.”
저는 이 대목이 늘 설교하고 성경공부 가르치고 말씀 전하는 입장에서 참 찔림으로 와 닿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신 애통하는 사람이다. 자가격리 중이더라도 성령이 우리 안에서 애통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드는 작은 성전이 된다.”
분석하고 설명하는 일로 그치는 일은 게하시의 태도입니다. 엘리사와 같은 심정으로 대신 애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중요한 것 아닙니까?
미자립교회 월세 대납 운동과 코로나바이러스를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을 위한 기금모금이 지난 금요일로 마무리가 되었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총 누적 헌금액이 32억 8000여만 원, 더 놀라운 건 은행 계좌이체 건수가 17,700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십시일반하여 33억 가까운 모금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N. T. 라이트 신학자의 말 그대로, 오늘 믿는 많은 신자들에게 이 하나님의 애통이 살아 있다는 것 아닐까요? 자립하지 못해서 신음하는 우리 주변의 참 좋은 목사님들, 참 좋은 교회들이 많은데, 그들의 그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애통함이 있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이런 모금운동은 분당우리교회만 하는 것 아닙니다. 전국의 너무나 아름다운 교회들이 지금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일들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이 헌금은 분당우리교회가 자랑하면 안 되는 헌금입니다. 전국의 교회와 성도님이 같은 마음으로 모금해 주신 것입니다. 제 마음에 이 사건이 너무나 감동이 되는 것이 한국 교회가 비판받을 일이 많이 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애통함을 가지고 십시일반하여 17,700여건의 정성이 모아져서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나타낼 수 있는 저력이 아직 한국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우리 안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지팡이만 의지하는 게하시’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엘리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 31절,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지팡이, 어떤 도구만 의지하는 게하시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33절을 보면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지팡이가 능력의 원천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가 의지할 전능자시라는 것을 인정했기에 기도했습니다.
27절에서의 엘리사의 태도는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엘리사의 말의 뜻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자신은 전능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것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과장하고, 성도들과 나는 좀 다른 존재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엘리사 선지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만 내가 알 수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막대기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문제의 대안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답은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엘리사가 바로 그런 정직한 인물이었습니다. 교회가 긍휼을 회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능력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저는 담임목사로서 그동안 저는 게하시와 같은 냉정하고 무성의하고 지팡이만 의지하는 태도는 없었는지, 많이 반성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정말 지금이라도 엘리사처럼 따뜻한 목사, 정성을 다하는 목사, 뿐만 아니라 능력은 내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으로 무장된 목사가 되어야 하겠다고 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이런 지도자가, 이것을 무장한 사람이 이 시대의 대안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과 또 이 예배를 함께 드리시는 모든 성도님께 한 가지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분당우리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일만성도파송운동’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일만성도파송운동’은 단순히 본 교회 성도를 5000명 이하로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목표가 되면 안 됩니다. 이제 앞으로 세워질 서른 개의 분립개척교회가 다 엘리사의 정신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에서의 15명의 교역자, 외부에서 모실 15명의 교역자로 구성된 서른 개의 분립개척교회 목사님들을 좋은 기준을 가지고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가평우리마을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연로하신 한 권사님께서 약자들과 장애인들, 또 이웃을 위하여 사용해 달라며 일평생 모으신 헌금과 아들한테 물려주면 아들 망칠 것 같으니 가치 있는 곳에 써달라고 교회에다 맡겨주신 가평의 2만여 평의 땅으로 시작된 가평우리마을입니다. 내년 가을에 개장 예정인 가평우리마을이 장애인 청년과 비장애인 청년이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협력하며 이루어져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아가 저는 가평우리마을을 놓고 꿈꾸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수많은 장애인들이 연세가 드시고 나이가 들어갔을 때, 장애인 부모님들이 눈물로 “이 아이보다 하루 더 살다 죽기를 원합니다. 그게 내 소원입니다”라고 하시는 이야기를 수십 번을 들었습니다. 가평우리마을에서 생기는 수익금을 가지고 이런 표현을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장애인양로원’의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두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는 가평우리마을이 어떤 공동체가 되면 좋을지 홈페이지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제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부탁은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숙박시설은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영감이 묻어날 수 있을지, 이곳의 커피숍은 세상의 화려한 커피숍과 차별화된 치유가 일어나는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오솔길 하나하나에 단순히 향기나는 나무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동산 곳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느끼게 할 것인지, 전문가들이 필요합니다.
어제 오전에 이 일에 수고하시는 카피라이터 두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들의 전문성과 정성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가평우리마을 설계해 주신 건국대 은퇴 교수님은 쁘띠 프랑스라고 아름다운 명소를 설계해 놓으신 분이십니다. 이 교수님은 이 사역의 의미를 크게 보시고, 지난 몇 년 동안 재능 기부를 해 주고 계십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공사현장에 가셔서 섬기고 계십니다. 이런 전문가분들의 땀과 수고가 이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치유의 세상, 차별화된 동산으로 만드는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드려질 부활주일 헌금 전액은 가평우리마을을 위하여 사용될 예정입니다.
결론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긴급구호‘와 ‘미자립교회 월세 대납 운동’이 지난 금요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신청서를 제출해 주신 미자립교회는 총 5천여 교회입니다. 그중에서 교단을 불문하고 제비뽑기로 900여 곳 선발했습니다. 어제 저녁입니다. ‘미자립교회 월세 대납 운동’을 섬겼던 교역자가 저에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점심 식사 후 서류 추첨된 몇몇 교회에 전화를 하던 중, 한 교회는 목사님이 전화를 받지 않고 사모님이 전화를 받으시길래 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이 주중에 건설 일용직으로 노동을 하고 대리운전을 하고 있어서 전화를 잘 못 받기 때문에 사모님 번호를 적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남편 목사님 전화번호를 물어 전화를 드렸더니, 지원금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 목사님 전화를 잡고 한참을 통곡하며 우셔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우셨습니다.) 제가 참 민망하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번 사역이 막막한 가운데 위로와 격려를 주는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이었던 것 같아 너무 감사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절망과 회복의 갈림길’이라고 정했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의 믿음을 가지고 대리운전, 건설 일용직으로 노동을 하시면서까지도 영혼을 섬기시는 이 귀한 분들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같이 나누고, 그들의 손을 잡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런 교회들이 모여서 어려운 한국 사회에 대안을 제시하는 꿈을 저와 예배 드리시는 모든 분들이 품고, 부활감사예배를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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