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추경은 홍남기 부총리 13살 때가 마지막
1950년 균형예산하려다 전쟁으로 일곱번 추경
IMF 체제 앞두고는 세수 모자라 감액추경도
1960년대까지는 '추갱'이라 불렀다?
코로나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는 정부 부처 관계자는 “앞으로 경제 상황 악화에 따라 돈이 더 필요한데, 이를 마련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당에서도 추가적인 지원책 마련을 위해 21대 국회가 시작된 이후 3차 추경이 필요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당시였던 1950년에는 7번의 추경을 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도 5,60년대에는 국회에서 한 해 3번의 추경안이 논의되는 것이 그리 보기 드문 장면은 아니었다. 하지만 1972년을 마지막으로 추경을 3번하는 장면은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예산을 담당하는 기획재정부 예산실에서도 “3차 추경을 언제 했었는지 알아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 정부는 반세기 만에 다시 3차 추경을 준비할 처지가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회계연도 기준) 기준 7번째 추가경정예산안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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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추경은 홍남기 총리 13살 때가 마지막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한해 3번의 추경이 이뤄진 것은 1972년이 마지막이다. 48년 전 일이다. 1960년생인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우리나이로 13살 때 일이고, 예산을 담당하는 구윤철 기획재정부 2차관이 8살때다. 사실상 현 정부 경제부처 안에서 ‘3차 추경’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은 전무하다.
1960년대에는 한해에도 세 번, 네 번의 추경이 이뤄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잦은 추경에 야당에서는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1965년 3차 추경에 대해서 당시 야당에서는 ‘위헌·위법적인 요소가 있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당시 야당은 3차 추경을 편성한 정부에 대한 경고결의안까지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1969년 추가경정예산안 관련 서류. 당시에는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경제기획원이 이 문서를 만들었다.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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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당시 추경에는 개발도상국으로서의 한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0년대의 추경 사유는 수해 복구, 겨울철 빈곤층 식량 지원, 콜레라 대책, 북한의 도발에 대응한 국방력 강화 등이 주를 이뤘다. 그 이후로도 보통 여름이 지나면 추경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태풍이나 집중호우 피해에 대한 복구를 위한 추경이었다. 1977년 11월에는 이리역에서 발생한 화약수송열차 폭발사고로 인해 추경이 이뤄지기도 했다.
◇추경이라는 말 처음 등장한 것 1950년 3월… 1950년엔 전쟁으로 7번 추경
‘추가예산안’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49년 3월 31일 국회에서다. 이날 국회에서는 1948년 회계연도 추가예산안이 다뤄졌다. 당시 정부 회계연도는 4월부터 새로 시작됐다. 우리에게 익숙한 ‘추가경정예산안’이라는 말이 국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 3월 23일이다. 이날 국회에서는 1949년 2차 추경에 대한 긴급동의안이 논의됐다.
단기 4283년, 그러니까 1950년 3월 31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정부 행정에 문제가 생기고, 미국 경제원조안에도 영향이 있다”며 “수지균형 예산안을 빨리 통과시켜 달라”고 호소한다. 3월31일까지도 그해 예산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몇 달 뒤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수지 균형 예산’을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결국 1951년 3월 20일 정부는 국회에 ‘1950년 7차 추경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전쟁 중이었던 당시에 정부가 급하게 예산을 편성해 사용하는 것에 대해, 국회에서는 “국회 의결도 없이 국가 예산을 쓴 자를 끌어내 헌법 위반의 대가로 목을 댕강 잘라야하는데…”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전쟁 중이었지만 예산안 편성과 국정감사를 통한 예산 사용 감시에 당시 국회의원들은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연도별 추경 횟수. 최근 들어서는 한해 2번 추경을 한 사례도 드물었다. / 국회 예산정책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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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만 있는게 아니라 경정도 있다
보통 추경이라고 하면 한 해 쓸 정부 예산의 규모를 늘린다는 ‘추가’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추경에는 ‘고친다’는 의미의 단어인 경정이 포함돼 있다. 당연히 정부 예산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었다. 1982년에는 예산안에서 2644억원을 감액해 예산의 규모를 9조5781억원에서 9조3137억원으로 줄였다. 경제성장 및 수출성장세 둔화에 따라 세수가 줄어드는 것에 맞춰서 예산을 줄이자는 내용의 추경이었다. 국회에선 “정부가 이듬해 예산을 짤 때 경제 전망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기 전인 1997년 10월 국회에 제출된 1차 추경도 무려 예산 8722억원 줄이는 내용이었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세금이 1조5909억원 덜 걷힐 것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전년도에 쓰고 남은 정부 예산 7187억원을 보태더라도 지출을 줄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경정’의 표기법이 달라진 부분도 흥미롭다.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 표지에서 ‘추가경정예산안’이라는 단어가 한자가 아닌 한글로 표시되기 시작한 1958년부터 1969년까지는 ‘추가갱정예산안’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후 1970년부터 ‘추가경정예산안’으로 표기법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추경의 표기가 추가경정예산안이 아니라 추가갱정예산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추경이 아니라 추갱이었던 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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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부터 한글 표기가 추가경정예산안으로 바뀌었다.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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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이후 가장 빨랐던 올해 추경안 국회 제출
정부는 코로나 사태 극복을 위해 올해 3월 5일 국회에 올해 첫 추경예산안을 제출했다. 1998년 1차 추경예산안을 2월 9일에 국회에 제출한 것에 이어 가장 이른 시점에 제출한 것이다. 1998년 1차 추경안을 짤 때는 IMF의 눈치를 보며 정부가 지출을 줄여야 했다. 당시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공무원의 임금을 동결해 행정비용을 줄이는’ 내용을 담은 추경안을 짜야했다. 적자국채를 찍어 추경을 할 수 있었던 올해와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올해 1차 추경안은 국회에 제출된지 2주도 안된 지난달 17일에 통과됐다. 국회 통과 시점만 보면 1967년(3월 9일 국회 의결) 이후 가장 이른 시점에 국회에서 통과된 셈이다.
2002년에는 9월 10일 국회 제출된 추경이 3일 뒤인 9월 13일 국회에서 의결된 바 있다. 당시 추경은 태풍 루사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태풍 루사는 그 이전 가장 많은 피해를 남겼던 1999년 태풍 올가가 남긴 피해의 5배 수준인 5조5000억원의 피해를 안겼다. 피해 복구와 이재민 지원 등을 위해 급히 추경이 국회를 통과해야 했다.
반면 지난해 미세먼지 극복과 강원 산불 피해 지원을 목적으로 4월 25일 국회에 제출된 추경은 8월 2일에야 국회에서 통과됐다. 미세먼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여름이 되어서야 미세먼지 추경안이 통과된 것이다.
[홍준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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