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11]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안재홍, 홍명희 |
"단재(신채호)는 영원한 나그네로 마쳤는가. 비(悲·슬픔)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는 학계의 지보(至寶·지극한 보배)로서 불행 옥사하되 일찍 위하여 구명(救命)의 계(計)를 못하였으니…."(안재홍)
"단재가 죽다니. 죽고 사는 것이 어떠한 큰일인데 기별도 미리 안 하고 슬그머니 죽는 법이 있는가.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한다. 나란 사람이라도 단재가 지기(知己)로 허(許)하고 사랑하는 터이니 죽지 못한다."(홍명희)
안재홍(1891~1965)과 홍명희(1888~1968)는 1936년 2월 25일 신채호의 유해가 청주 낭성면 교래리에 묻힌 직후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고인을 애도했다. 안재홍의 추도문 '오호(嗚呼) 단재를 곡함'(2월 27일)과 홍명희의 '곡(哭) 단재'(2월 28일)가 잇달아 실렸다.
안재홍과 홍명희는 중국으로 망명한 신채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내 독립운동 및 지식계를 잇는 주요 인물이었다. 홍명희는 신채호를 설득해 1927년 좌우합작 민족 단체 신간회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했다. 안재홍은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의 조선일보 연재를 주도했다.
안재홍과 홍명희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선일보 사람들'의 중심인물이었다. 안재홍은 1924년 조선일보 주필로 초빙된 후 발행인·부사장·사장을 거치며 약 8년간 조선일보에 재직했다. 소설 '임꺽정'을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한 홍명희는 옥고 등으로 집필을 몇 차례 중단하면서도 1940년 8월 일제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시킬 때까지 13년간 연재했다. 아들 홍기문은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냈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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