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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딱딱한 줄 알았던 조선 사대부…그들 일상의 부드러운 속살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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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후의 지암일기’ 완역본 출간한 성균관대 하영휘 교수

경향신문

<윤이후의 지암일기> 한글 완역본을 펴낸 하영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지난 10일 경향신문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조선 역사를 정치사나 유학사로만 다루다보니 구체적인 모습들이 부족한데 <지암일기>는 실제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그려준다”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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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경직된 유교국가로만 이해하잖아요. <윤이후의 지암일기>는 우리가 알지 못한 조선 사회의 보드라운 속살을 보여줍니다.”

지암(支菴) 윤이후(1636~1699)는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공재 윤두서의 생부다. 할아버지의 문명(文名)과 아들의 화명(畵名)에 가려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당대에는 남인의 거두 윤선도의 정치적 유산과 해남 윤씨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아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이다. 말년에 해남 죽도에 은거하며 ‘일민가(逸民歌)’라는 수준 높은 가사 작품을 남겼다.

<지암일기>는 그가 전라도 함평현감이던 1692년 1월1일부터 세상을 뜨기 닷새 전인 1699년 9월9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다.

고산 윤선도의 손자가 쓴 일기

연구자 8명이 6년간 번역 작업

“조선 후기 일상사의 보물창고”

등장 인물만 2500여명 달해


지난달말 하영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66) 등 8명의 연구자가 작업한 한글 완역본이 처음 나왔다. 지난 10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하영휘 교수는 “역사를 왕과 상층부의 정치사로만 배우다보니 디테일이 부족한데 <지암일기>는 조선시대의 ‘결’을 보여준다”며 “조선 후기 일상사의 보물창고”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지암일기>는 환란의 시대에 쓰였다. 사회적으로 혹독한 기근이 닥치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정점으로 치달았다. 윤이후의 일기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강도가 들끓었던 을병대기근(1695~1696)의 정경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한양 가는 길에서 본 아사자들, 도망쳤다가 굶주림에 지쳐 스스로 돌아온 노비 등 당대의 참혹한 실상을 그대로 전합니다.”

정치적 격변도 엿볼 수 있다. 기사년(1689)에는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남인이 득세했다가, 갑술년(1694)에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인은 모조리 쫓겨난다. 셋째 아들 종서도 ‘세자 저주 무고 사건’에 연루되어 죽는다. “윤이후는 일기를 보면 좀 의욕이 없던 사람 같아요. 실력은 있었지만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싫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남인의 중진으로서 유배 온 사람들의 뒤를 봐주고 편지와 시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조선 역사에서 당쟁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도 구체적 모습은 잘 안 나오는데 중앙 조정의 정황을 여러 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는 단서들을 품고 있죠.”

생활상도 고스란히 남겼다. ‘바람 불고 흐리다 저녁에 눈.’ 일기를 펼치면 여느 초등학생처럼 꼼꼼하게 기록한 날씨가 처음 눈에 들어온다. 태양의 이상현상은 그림까지 그리며 설명하고, 자신의 동정과 질병, 여가 등 일상생활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만 자그마치 2500여명. 엘리트 계층만이 아니라 노비, 공인, 점쟁이, 악사, 가수, 화가, 기생, 걸인 등 다양한 하층민들이 등장한다. “윤이후는 조선시대 전형성에서 벗어난 입체적 인물입니다. 지(支)는 뻗어나온, 튕겨 나왔다는 의미죠. 일민(逸民)도 세상의 영욕에서 일탈했다는 뜻이에요. 봉건사회의 한계는 있지만 ‘인간애’가 느껴지는 인물이랄까. 신분이 낮다고 어느 사람이나 깔보는 게 없습니다. 비(婢)였던 자신의 유모가 죽자 자세히 추억하면서 그 자손들을 배려한다든지 인간에 대한 소박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납니다.”

김경룡이라는 장사를 만나고 쓴 일기에서 편견 없는 시선이 보인다. “체구는 작지만 용맹이 남다르고 총을 잘 쏘아 지금까지 잡은 호랑이가 20여 마리다. 올해 나이가 여든인데, 근력과 정신이 조금도 쇠하지 않고 눈동자가 빛나고 시력이 좋다. ‘젊었을 때 호랑이 여섯 마리의 눈 12개를 먹었습니다. 지금껏 시력이 쇠하지 않은 것이 혹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그가 말했다.”(1697년 4월6일자)

거제에 유배된 아들을 보러갔다가는 왜선을 타보기도 한다. “배에 올라 꼼꼼히 살펴보고, 일본 사람들과 필담을 시도합니다. 조선시대면 꽉 막혀 있는 걸로 생각하잖아요. 실제는 달랐던 거죠.” 윤이후는 사대부에 대한 고정관념과 달리 직접 ‘경영’에 나섰다. 해남 일대 해안과 섬에 둑을 쌓고 그 안에 농지를 조성한 것이다. 연인원 수천명이 동원된 규모에서 조선시대 양반 주도하에 이루어진 간척공사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인간애·편견 없는 시선 ‘매력’

거제에서 왜선 올라 살펴보고

일본인과 필담 시도한 기록도


<윤이후의 지암일기>는 2013년 11월 번역에 착수해 6년여 만에 빛을 봤다. 1272쪽에 달하는 노작이다. “20년 전부터 강독 세미나를 해왔어요. ‘조선시대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폭을 넓혀줄 것’이라는 추천에 <지암일기>를 읽게 됐습니다. 격주로 토요일 아침 10시에 만나 저녁 6시까지 읽고 토론했어요. 느슨하고 자발적으로 한 덕에 계속된 것 같습니다.” 첫 기대대로 <지암일기>에는 화석처럼 경직된 유교사회의 모습은 없었다. 이제까지 큰 이야기들이 담아내지 못한 세부를 구석구석 채울 수 있었다. 결국 사람 사는 얘기다.

하 교수는 이전부터 편지글 등 일상생활을 담은 고문서를 천착해왔다. 올해 대학 정년을 마친 뒤에도 동학들과 함께하는 옛글 읽기는 계속된다.

“고문서가 풍기는 냄새가 있습니다. 보풀이 이는 종이의 질감, 오래된 먹의 빛깔. 옛날 그 사람의 손으로 직접 쓴 글과 활자화된 글은 느낌이 달라요. 글자에서 쓴 사람의 체취가 느껴진달까. 고문서의 매력이죠.”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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