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임기 동안 늘어난 대미 투자액과 일자리
무기 구입비, 국제 안보 활동… 돈으로 계산해 스토리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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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선 워싱턴지국장 |
최근 캐나다의 핼리팩스 안보포럼에서 만난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방위비 관련 질문을 했을 때 그는 "미국은 한국에 50억달러를 쓰고 있고,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170억달러를 넘는다"는 얘기부터 했다. 그래서 한국이 방위비를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트럼프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트럼프 정부의 다른 관리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엔 미국에 없는 고속철도와 의료보험도 있지 않으냐" "무임승차는 안 된다"고 한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 논리와 사례는 점점 정교해지고 풍부해지고 있다. 듣다 보면 세상에 한국처럼 잘사는 나라 없고, 한국처럼 뻔뻔한 나라도 없는 것 같다. 마치 하나의 대본을 읽는 듯한 이 일사불란함은 트럼프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대변한다.
워싱턴에서 한·미가 방위비 협상 중이던 이달 초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5년 만에 한국에 와서 한·미가 아직 본격 논의를 시작하지도 않은 중거리 미사일 배치와 사드 정식 배치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워싱턴에선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과정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해 중국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나온 발언으로 봤다.
미 의회와 워싱턴 전문가들도 무리라고 비판하는 트럼프의 50억달러 요구는 한국이 현실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이다. 그러므로 협상은 돈이 아니라 그 액수에 준하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식으로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의 우려가 꽂힌 부분도 바로 그 지점이었을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압박에 밀려 돈 대신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나 사드 정식 배치를 협상 테이블에 올릴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는 강수까지 두는 미국도 두 가지는 알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이 50억달러는커녕 그 반의반도 부담하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지나친 압박을 가하다가는 한국이 속된 말로 '배째라'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너무 크고 중요해서 실패하면 안 된다"는 얘기가 트럼프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협상이 실패해 동맹이 타격을 입는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도 큰 부담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50억달러라는 액수를 던졌지만 전부 받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의 협상은 미국 측이 한국이 어느 정도까지 부담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방위비 협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은 얼마나 창의적으로 방위비를 계산해낼 수 있느냐가 열쇠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기업들이 트럼프 임기 동안 미국에 투자한 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일자리 수를 부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트럼프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내년 대선 유세 때 과시할 자랑거리이다. '동맹국 한국을 지켜줬더니 한국 기업이 미국에 이렇게 많이 투자해서 일자리를 만들어줬다'는 스토리야말로 그가 원하는 성과일 수 있다. 미국이 한국을 '잘사는 나라'로 포장해 방위비 증액을 압박하듯 우리도 '미국에 투자 많이 하는 나라'임을 강조해 무리한 증액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기존 항목 외에 한국 방어에 들어가는 비용이라며 새 항목을 추가한 것처럼 한국도 무기 구입비, 국제 안보 유지 활동비 등을 새 항목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협상팀이 마주 앉아 미국의 핵우산 제공 비용은 얼마인지, 한국이 호르무즈 연합이나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참여한다면 얼마를 쳐줄지를 계산해내야 할 수도 있다. 민망하고 기가 막히지만 이것이 트럼프 시대 70년 혈맹이 처한 현실이다.
[강인선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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