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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 (토)

[워싱턴리포트] '트럼프식 돈 계산법' 역으로 이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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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임기 동안 늘어난 대미 투자액과 일자리

무기 구입비, 국제 안보 활동… 돈으로 계산해 스토리 만들어야

조선일보

강인선 워싱턴지국장


최근 캐나다의 핼리팩스 안보포럼에서 만난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방위비 관련 질문을 했을 때 그는 "미국은 한국에 50억달러를 쓰고 있고,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170억달러를 넘는다"는 얘기부터 했다. 그래서 한국이 방위비를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트럼프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트럼프 정부의 다른 관리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엔 미국에 없는 고속철도와 의료보험도 있지 않으냐" "무임승차는 안 된다"고 한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 논리와 사례는 점점 정교해지고 풍부해지고 있다. 듣다 보면 세상에 한국처럼 잘사는 나라 없고, 한국처럼 뻔뻔한 나라도 없는 것 같다. 마치 하나의 대본을 읽는 듯한 이 일사불란함은 트럼프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대변한다.

워싱턴에서 한·미가 방위비 협상 중이던 이달 초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5년 만에 한국에 와서 한·미가 아직 본격 논의를 시작하지도 않은 중거리 미사일 배치와 사드 정식 배치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워싱턴에선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과정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해 중국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나온 발언으로 봤다.

미 의회와 워싱턴 전문가들도 무리라고 비판하는 트럼프의 50억달러 요구는 한국이 현실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이다. 그러므로 협상은 돈이 아니라 그 액수에 준하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식으로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의 우려가 꽂힌 부분도 바로 그 지점이었을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압박에 밀려 돈 대신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나 사드 정식 배치를 협상 테이블에 올릴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는 강수까지 두는 미국도 두 가지는 알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이 50억달러는커녕 그 반의반도 부담하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지나친 압박을 가하다가는 한국이 속된 말로 '배째라'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너무 크고 중요해서 실패하면 안 된다"는 얘기가 트럼프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협상이 실패해 동맹이 타격을 입는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도 큰 부담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50억달러라는 액수를 던졌지만 전부 받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의 협상은 미국 측이 한국이 어느 정도까지 부담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방위비 협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은 얼마나 창의적으로 방위비를 계산해낼 수 있느냐가 열쇠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기업들이 트럼프 임기 동안 미국에 투자한 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일자리 수를 부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트럼프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내년 대선 유세 때 과시할 자랑거리이다. '동맹국 한국을 지켜줬더니 한국 기업이 미국에 이렇게 많이 투자해서 일자리를 만들어줬다'는 스토리야말로 그가 원하는 성과일 수 있다. 미국이 한국을 '잘사는 나라'로 포장해 방위비 증액을 압박하듯 우리도 '미국에 투자 많이 하는 나라'임을 강조해 무리한 증액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기존 항목 외에 한국 방어에 들어가는 비용이라며 새 항목을 추가한 것처럼 한국도 무기 구입비, 국제 안보 유지 활동비 등을 새 항목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협상팀이 마주 앉아 미국의 핵우산 제공 비용은 얼마인지, 한국이 호르무즈 연합이나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참여한다면 얼마를 쳐줄지를 계산해내야 할 수도 있다. 민망하고 기가 막히지만 이것이 트럼프 시대 70년 혈맹이 처한 현실이다.

[강인선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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