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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충무로에서] 총수 셀카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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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19년 재계는 '셀카의 해'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화제의 장면을 돌이켜보니 '회장님 셀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올 한 해 4대 그룹은 물론이고 대기업 총수들마다 직원들과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유난히 많이 남겼다. 1월 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스타트를 끊었다. 이 부회장이 점심 때 수원 본사 구내식당에 등장해 직원들과 식판을 들고 셀카를 찍은 이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비슷한 인증샷을 남겼다. 복장 자율화를 선언한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은 직원들과 청바지 셀카를 찍었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임직원과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총수들이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와 직원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려 했던 한 해였다는 방증이다.

오너가 자기 직원들과 밥 먹고 사진 한 장 올리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대내외적으로 은둔의 경영자로 각인된 그들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당연한 사진 한 장조차 귀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도 국민과 수시로 셀카를 찍는다. 이렇게 한국 사회 곳곳에 격의 없는 셀카가 번지는데 정작 변하지 않는 곳이 하나 있다. 정장 차림에 1열 횡대로 도열해 인증샷을 남기는 곳. 사진 속 얼굴은 웃고 있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다. 바로 정부 당국자들과 재계 인사들의 만남이다. 하반기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심화되자 정부는 뒤늦게 기업들을 불러 대책 협의에 나섰다. 경제부총리·정책실장 등이 줄줄이 총수들과 간담회를 했다. 외교로 풀 일을 애꿎은 기업들을 동원해 풀려니 자리가 편할 리 있겠는가. 재계단체에서 청와대 고위 인사나 공정거래위원장 등을 초대한 행사도 그림은 비슷하다. 사진 한 장이 그날의 불편함을 말해준다.

뒷걸음치는 한국 경제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다. 수출 부진, 임금 상승 등 악재가 겹치면서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경제 정책은 여전히 일방통행이다. 최근 청와대 정책실장이 경총 회장단과 만난 자리에서 정부의 노동 존중 기조에는 변함이 없으니 경총이 스스로 노사 관계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정부가 기업과 접촉을 늘린다 해도 실제 정책은 이렇게 일방통행이다 보니 재계 불만만 커진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만날 때 '셀카'를 시도해 봤으면 한다. 실질은 차치하고, 형식으로라도 한번 해봤으면. 혹시 그러다 보면 정말 편안하게 소통하고 대화하게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산업부 = 한예경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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