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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충무로에서] 조커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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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트럼프 카드에는 예외 없이 54장이 섞여 있다. 이 중 두 장이 조커다. 필요가 없기에 일단 버리고 친다. 포커 판이 끝날 때까지 조커가 소환되는 일은 없다.

최근 개봉한 영화 '조커'는 버려진 카드의 숙명을 비장하게 그린다. 주인공 아서 플렉은 코미디언을 꿈꾸는 거리의 광대. 구타와 조롱은 예사. 해고되면서 알게 된 출생의 비밀은 밑바닥 분노를 끌어올린다. 버려짐의 역설이랄까. 빨간 양복에 광대 분장을 하고 위풍당당하게 계단을 춤추며 내려오는 그는 더 이상 루저가 아니다.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던 1000개 계단에서 그는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포효한다. 악당 조커의 탄생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반(反)정부 시위에 조커 차림을 한 시위대가 등장하고 있다. 눈·코·입을 빨강과 초록으로 칠한 이들이다. 불평등의 상징이 된 조커가 가장 환호할 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불타는 칠레 산티아고가 아닐까. 지하철 요금 50원을 인상하려고 했을 뿐인데 시민들이 지하철과 버스에 불을 지른다. 거리에는 탱크가 등장하고 무장 군인들이 시위대에 총을 겨누고 있다. 한 달 새 22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부상했다.

남미에서 가장 부자 나라인 칠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1970년대 이후 칠레는 피노체트 장기 독재 정권 아래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시카고학파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의 조언대로 시장을 개방했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했으며 각종 규제를 철폐했다. 최소한의 안전판이 돼야 할 국민연금·교육·건강보험도 민영화했다. 레이건의 미국과 대처의 영국보다 더 과감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험했다. 결과는 최근까지만 해도 성공적으로 보였다. 그 흔한 남미식 경제위기도 비껴갔을뿐더러 최근에는 3~4% 성장을 일궜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들조차 "대기업이 성장하고 경제가 커지는 동안 중산층은 몰락했고 극빈층은 더 늘었다"고 아우성친다. 유엔 중남미·카리브경제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칠레 상위 1%가 부(富)의 26.5%를, 하위 50%는 겨우 2.1%만 차지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칠레다.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은 분노의 트리거였을 뿐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조커가 총을 드는 결정적 이유는 누구도 자기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시위 사태를 그저 '폭력 시위'라고 낙인찍는 순간 대화는 사라지고 총성만 오간다. 경청하는 것, 그것이 조커들의 반란을 잠재우는 첫 단추다.

[이향휘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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