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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말모이 100년, 내가 사랑한 우리말] [4]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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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조선일보

바이올린과 함께한 65년. 지독히 한 가지에 몰두해온 삶이다. 활 하나로 네 개의 현이 달린 작은 나무 악기를 울려 소리를 낼 뿐이지만, 이미 오래전 그곳에서 끝 모를 우주를 보았다. 세월은 흘렀건만 신비함은 끝이 없다. 희로애락 인생 경험이 겹겹이 더해지니 신비함이 더 오묘해진다.

온 진심을 다해 음악이라는 소리를 빚는다. 어릴 적에 읽은 황순원의 '독 짓는 늙은이'의 감동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서라도 더 나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나의 소망과 통했다. 간절한 마음의 울림이 악기의 울림이 되고 동시에 공간의 울림이 되어 마침내 청중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심금을 울린다. 함께 연주를 하는 셈이다. 청중의 마음에 울림이 있었다면, 그 울림과 함께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었다면, 나 역시 행복하다.

위대한 작곡가가 남긴 음악은 마르지도 닳지도 않는 인류의 유산이다. 명작에는 크고 작은 마음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힘이 있다. 특별한 재주로 평생을 헌신한 장인들이 남긴 악기 또한 저마다의 독특한 울림이 있는 예술 작품이다. 내가 항상 목말라하는 이상적인 울림의 공연장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좋은 곡을, 좋은 연주자가, 좋은 악기로, 좋은 공간에서, 좋은 청중과 나누며 깊은 마음의 울림을 경험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감히 누릴 만한 행복의 하나다.

조선일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던 김구 선생이 꿈꾸던 아름다운 나라엔 음악이라는 예술이 주는 이러한 행복이 분명히 있었을 게다. 문화는 발전한 나라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다. 지금이라도, 마음이 고단하고 팍팍할수록 음악과 그 밖의 예술작품을 가까이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수십 년간 연주를 위해 세계를 돌아다닌 까닭에 여러 언어를 접하고 배웠지만,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정신과 마음을 지배한 언어는 단연코 우리말, 우리글이다. 어딜 가나 생소한 나라에서 온 작은 여자아이라는 선입관과 편견에 맞서야 했으나 한국인이라는 내 자부심만큼은 비할 수 없이 컸다. 아끼고 좋아하는 수없이 많은 우리말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 쉽지 않으나, 음악인으로서 ‘울림’이 단번에 떠올랐다. 이토록 과학적이고도 시적인 표현이라니! 내 나라의 절묘한 말로 음악에 대한 소회를 몇 자 적으니 이 또한 행복한 일이다. 때로 옷매무시를 새로이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아 우리말, 우리글을 공부하는 상상을 해본다. 옛날에 본 그 맑은 밤하늘의 별처럼, 사랑스러운 우리말이 끝도 없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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