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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3 (일)

[길] 힘들고 위로가 필요한 당신… 이 우편함에 편지 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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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알코올중독" "취업 못해" 익명의 고민 편지 2년여간 7000통

자원 봉사자들이 경험담 녹여내 일일이 손편지 써서 답장 보내

"시간 들여 답장 쓰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어"

"아이들 모두 집을 떠나고, 수많은 사람 중 하필이면 그 사람을 만나 먼저 보내고, 매일 슬퍼하며 지낸 세월도 20년. 외로움 달래고 싶지만…."

서울 신림동 '온기(溫氣)우편함' 안에는 배우자와 사별하고 자녀도 독립시킨 어느 홀몸 노인의 이러한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 편지를 포함해 최근 서울시내 6개 우편함에서 수거한 고민편지 200여통이 9일 광진구의 비영리단체 '온기제작소' 사무실에 쌓였다. 편지들은 "중학생 딸에게 사춘기가 왔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졌다" "용돈을 더 많이 받고 싶다" "남편의 알코올중독 때문에 힘들다" 등 저마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담고 있었다.

조선일보

지난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 온기우편함이 놓여 있다(왼쪽 사진). 이날 서울 광진구 온기제작소에서 봉사자들이 신림동 등 6곳의 온기우편함에 온 편지들을 읽고 답장을 쓰고 있다. /강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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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자원봉사자 8명이 편지를 집어들어 읽고, 자신이 답할 만한 것을 골라 펜으로 답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춘기 딸 고민'에 대한 답장은 '딸을 둔 엄마'인 자원봉사자 이현화(46)씨가, '친구들과 멀어진 고민'은 현직 교사인 김의연(34)씨가 각각 맡았다. 홀몸 노인 편지에는 "누군가의 부재는 슬픔을 깊게 만들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도리어 힘이 됐어요"로 시작하는 편지지 4장짜리 답장이 작성됐다. 답장은 다음 주 발신자들에게 배달된다.

온기우편함은 '온기제작소'와 한국우편사업진흥원이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사람에게 온기를 전하자'는 의미로 2017년 2월 시작한 사업이다. 매주 목요일 편지를 수거해 자원봉사자 100여명이 시간을 나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답장을 쓴다. 편지는 '3주 이내 답장'이 원칙이다. 온기제작소 조현식 대표는 "PC 워드프로세서 글씨와 달리 손글씨는 쓰는 것도 지우는 것도 시간과 품이 든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시간 들여 답장을 해 줬다'는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답장을 쓰는 자원봉사자를 '온기우체부'라고 부른다. 온기우체부들은 주로 자신의 경험을 답장에 녹인다. 취업준비생 신희경(28)씨는 "취업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는 고민에 "모두 자신의 길이 있으니 조급해하지 말고 함께 자신감을 가지자"고 편지를 썼다. 30대 자녀를 둔 노기화(61)씨는 2년 전 받은 딸뻘 예비신부의 편지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혼자 혼수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노씨는 오래 고민하다 엄마의 마음으로 "딸아, 엄마 아빠가 하늘에서 보고 있을 테니 식장에서 꼭 멋지고 당당하게 걸으라"고 했다. 섣불리 답하기 어려운 고민엔 시(詩) 한 편으로 답장을 대신하기도 한다.

고민편지 발신자가 훗날 온기우체부가 되기도 한다. 정지민(20)씨는 고3 때 온기우편함에 편지를 보냈다 5장짜리 답장을 받았다. 정씨는 "그때의 나 같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했다. 때때로 "답장 감사하다" "작년에 취업 고민을 했었는데, 취업에 성공했다"는 답장이 돌아올 때 보람을 느낀다고 자원봉사자들은 말한다.

온기우편함은 현재 서울 삼청동·신림동·광화문 등 6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사업 시작 후 18일까지 고민을 담은 편지 7024통을 받았고, 대부분 답장했다. 온기제작소는 올 연말 노량진에 7번째 우편함을 개설할 예정이다.

[이동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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