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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충무로에서] 경찰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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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었을까, 연쇄살인마의 악의적 거짓말일까.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가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다. 박수 받으며 행진하던 경찰 수사의 스텝이 엉킨 건 "8차 사건도 내가 저지른 것"이란 용의자 이춘재의 진술 때문이다. 8차 사건은 과거 수사에서 모방 범죄로 결론 났고, 범인으로 지목된 당시 20대 윤 모씨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춘재의 자백으로 진실을 놓고 다시금 한바탕 소동이 일고 있다.

이춘재의 자백이 맞는다면 윤씨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셈이다. 그는 줄곧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이라면 공권력과 사법 시스템에 의해 한 사람의 인생이 철저히 유린된 것이다. 재심과 국가 차원의 합당한 배상은 당연할 것이고, 수사와 재판 과정에 참여했던 이들 모두 엄중한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 과정에선 공권력 남용으로 인한 억울한 피해자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등 수사기관의 강압에 의해 왜곡됐던 사건이 재심으로 진실이 밝혀진 사례도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합리적 의심을 가지는 이유다. 더군다나 경찰은 이춘재의 범행 자백 발표 당시 8차 사건 실토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을 의식한 의도적 은폐가 아니었냐는 의혹마저 나온다.

반대의 경우라도 문제는 간단치 않다. 다른 사건들에 대한 이춘재 진술의 신빙성도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가능성이 높진 않겠지만) 일부 사건은 그의 소행이 아닐 수도, 최악의 경우 그가 진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연쇄살인범들이 자기 과시를 위해, 혹은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범죄를 부풀리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미국의 연쇄살인범 헨리 리 루커스는 17개 주에서 360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11건이었다. 극단적 허언증으로 인한 거짓 진술이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자백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춘재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경찰과 언론이 요동치는 현 상황을 즐기는 듯하다"며 "8차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가 보관돼 있다면 DNA 검사로 간단히 검증될 문제인데, 증거물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찰 앞에 놓인 길은 두 갈래. 모두 가시밭길이다. 어두운 과거를 있는 그대로 들춰내든지, 사건 수사를 원점부터 재검토하든지. 어느 쪽이든 마주해야 할 것은 진실이다. 필요한 것은 진정한 용기다.

[사회부 = 이호승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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