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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은행권 DLS·DLF 사태

[한겨레 프리즘] 버핏한테 DLF 팔 수 있을까 / 정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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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세라
경제팀 기자


여기 판돈이 1억원인 게임이 있다.

갑과 을이 참여하는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갑은 게임을 시작할 때 을에게 넉달 뒤 140만원을 주기로 하고 카드를 하나 산다. 갑은 4개월 뒤 을한테 이 카드를 다시 되팔 권리가 있다. 다만 카드를 팔 가격은 4개월 뒤 금리 수준에 따라 미리 정해놓는다. 현재 금리는 -0.1%인데 넉달 뒤 금리가 -0.3% 이상이면 카드값은 0원이다. 갑은 140만원 주고 산 카드를 을에게 되팔아봐야 0원이니 140만원을 잃은 셈이다. 반대로 을은 갑에게 카드를 판 덕분에 140만원을 벌게 된다.

하지만 금리가 내려가면 상황은 급변한다. 금리가 -0.4%로 떨어지면 카드를 팔 수 있는 가격은 3333만원이다. 이어 -0.5%면 6666만원, -0.6% 이하면 1억원이 된다. 갑은 넉달 뒤 금리가 -0.6% 이하라면 고작 140만원 주고 샀던 카드를 1억원에 을에게 되팔 수 있다. 을은 140만원에 팔았던 카드를 ‘울며 겨자 먹기’로 1억원에 되사줘야 한다. 그렇게 넉달 뒤 돈 정산이 끝나면 ‘게임 오버’.

갑의 경우를 풋옵션(팔 권리) 매수라고 하고, 을의 경우를 풋옵션 매도라고 한다. 통상 풋옵션 매수는 약간의 돈을 주고 낮은 확률로 큰돈을 버는 기회에 베팅하는 것이다. 풋옵션 매도는 큰 확률로 약간의 돈을 벌 수 있지만, 자칫 큰돈을 잃어버리는 위험에 베팅하는 것이다.

사실 지난 26일 원금 100% 손실로 만기를 맞은 독일 국채금리 연계형 파생결합상품(DLF)에 돈을 넣은 이들은 이런 게임에서 을의 경우에 베팅한 것이다. 을들은 이번 판에서 1억원 판돈을 전부 잃고, 140만원만 받게 됐다. 그나마 판돈을 다 날릴 걸 우려한 일부 을들이 벌칙금을 물고 게임에서 중도이탈하는 바람에 그 벌칙금이 분배되는 등의 사유로 190만원을 손에 쥐게 됐다.

이번 게임에서 을에 베팅할 참가자를 끌어모은 것은 ‘은행’이었다. 은행은 이 과정에서 판돈 1억원당 100만원 정도의 수수료를 챙겼다.

은행이 주선한 이번 게임이 공정하려면 참가자들은 게임의 룰과 위험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했다. 또 4개월 뒤 금리 전망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찾아내어 감별하고, 이번 판의 유불리를 따져볼 능력도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미-중 무역분쟁, 브렉시트 동향, 글로벌 경기 흐름, 마이너스 금리 추세를 대강이라도 파악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참가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모르면 게임을 안 하는 게 맞다.

특히 은행은 수수료를 챙긴 만큼 법적 책임이 있었다. 게임의 룰과 위험을 참여자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것은 물론, 얘기해도 이해를 잘 못하거나 위험도를 감수할 만한 재력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참여자는 게임에 끌어넣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은행은 게임 참여자를 어떻게 모았나. 치매 노인한테도 게임을 권했고, 10년을 일해도 1억원을 모으기 어려운 최저시급 노동자나 대출 갚을 돈을 들고 온 사람에게도 게임 참여를 권했다. 그래서 을들은 분노하고 있다. 지난 27일 을들은 국정감사를 앞둔 국회 앞에 모여 “왜 우리한테 ‘투자의 자기 책임’ 원칙만 강요하느냐”며, 게임 주선자인 은행과 게임 감시자인 금융당국(정부)의 책임을 제대로 따져 물을 것을 요구했다.

은행은 슬그머니 볼멘소리를 한다. “고령자라고 다 뭘 모르나. 워런 버핏도 90살이 다 됐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은행이 끌어들인 어르신이 정말 투자 귀재 워런 버핏이었나. 피해자로 만나본 어르신이나 중장년 주부들은 조금만 얘기를 나눠 보면, 글로벌 금리 동향을 판단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란 점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워런 버핏이었다면, 아니 워런 버핏까진 아니더라도 뭘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지난 5월 말 같은 글로벌 금리 하락 시국에 억대 돈을 ‘뭉텅’ 베팅했을까. 아니, 국내 은행 피비(PB)들은 워런 버핏의 돈을 디엘에프에 끌어들일 수 있었을까. 글쎄…. 내 생각엔 아니었을 것 같다.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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