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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75] 긴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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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긴 오후

흙탕물도 비스듬히 보면 맑은 구름이 비친다 그 안에 열심인 듯 흙물을 솎아내는 누군가

엄마도 아빠도 죽은 사람 아픈 사람도

그 속에 들어가 한 가계의 흙 앙금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본다

―신효순(1984~ )

가끔 격렬한 소나기가 지나가곤 합니다. 정변을 일으키는 군사들처럼 거칠게 퍼붓다 지나갑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게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직 ‘긴 오후’가 남았습니다. 군데군데 ‘흙탕물’이 고여 있습니다. 얕은 자리는 이내 마르지만 깊은 데는 며칠이 가기도 합니다. 그 느닷없는 폭우의 ‘흉터’를 오래 보아야만 할 때, 보는 자리도 여럿이어서 ‘비스듬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거기 ‘맑은 구름이’ 비치고 있습니다. 개인사에도, 한 가계(家系)에도 그러한 일들이 손쓸 수 없이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한 공동체에도 그러합니다. 역사에도 그러하지요. “그 안에/ 열심인 듯 흙물을 솎아내는 누군가”는 분명히 있어서 천천히 ‘흙 앙금’은 가라앉습니다. ‘죽은 사람 아픈 사람도’ ‘흙물을 솎아내는 누군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의 발견은 귀중합니다. 큰물이 나면 내내 비어 있는 큰 골짜기의 역할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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