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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도굴꾼 잡는 '문화재 투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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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배광훈… 해저 도굴 사건 땐 항구서 잠복, '만국전도' 회수하려 미행까지…

소속은 문화재청 공무원이지만 수사·체포권 등 경찰과 같은 권한

모든 건 문자 한 통에서 시작됐다. 2018년 봄 한상진(39)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 전화기가 띠링 울렸다. "이거, 한 반장이 말한 지도 같은데 확인해봐." 사진 4장이 첨부돼 있었다. 발신자는 오랫동안 밥 먹고 술 마시며 관계를 다져온 고미술계 정보원. 사진 속 고(古)지도는 한 반장이 "시장에 매물로 나오면 꼭 연락 달라"고 당부했던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萬國全圖)'였다.

그로부터 1년여 뒤, '만국전도'를 비롯해 함양 박씨 문중에서 도난당한 문화재 117점을 입수해 처분하려던 업자들이 붙잡혔다. 한 반장은 "사진 경로를 역추적하고, 관련 지역 골동품 업자들을 수십 차례 탐문하니 범인 윤곽이 나왔다"며 "검증과 회유, 잠복과 압수수색 끝에 범인을 검거하고 보물을 온전히 회수했다"고 했다. "그자의 입에서 '식당 벽지 속에 숨겨놨다'는 자백이 나오는 순간 전율을 느꼈죠."

조선일보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의 한상진(오른쪽) 반장과 배광훈 주무관이 수갑을 나눠 들고 포즈를 취했다. 전국을 돌며 문화재 도둑을 잡는 두 사람은 올해에만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를 비롯해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 목판,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도굴된 도자기 등 굵직한 회수 실적을 냈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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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단속반 경력 10년 차인 한 반장과 3년 차 후배 배광훈(36) 주무관은 '문화재청 투캅스'로 통한다. 소속은 문화재청 공무원인데 일상이 잠복과 첩보 입수, 미행과 현장 단속이다. 도난·도굴·해외 밀반출 관련 '문화재 도둑'을 잡는다. 문화재 사범(事犯)에 관한 한 수사권·체포권 등 경찰과 똑같은 권한을 갖고 있다.

1년 중 150~200일은 출장. 일도 고되고 험하다. "해저 도굴 사건은 무조건 현장에서 잡아야 하기 때문에 추운 바다 항구에서 잠복하죠. 일본 쓰시마에서 훔쳐온 불상 사건은 알고 보니 지방 조폭 세력과 연계돼 있었어요. 최종 자금을 댄 사람이 조폭 두목이었습니다."

한 반장은 "문화재사범신고 공식 전화로 제보가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정보원 인맥과 첩보로 수사가 이뤄진다"고 했다. "도굴은 주로 팀 단위로 움직여요. 유통책·판매책·자금책… 돈 문제로 내부 싸움이 일어나면 안에서 누군가 제보하게 돼 있지요."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도굴한 중국 도자기를 자기 집 안방 장롱 속에 36년간 감춰온 남자도 지난 6월 '내부 고발자' 덕에 붙잡았다.

덜미가 잡힌 업자들은 문화재를 볼모로 협박하는 경우가 많다. "지도를 불태워버리겠다" "도자기를 바다에 버리고 잠적하겠다"는 식이다. 이 때문에 피의자와의 '밀당'은 필수. 배 주무관은 "문화재 도난 사건은 유물을 안전하게 회수하는 게 최종 목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입을 열기 위해 밀당과 회유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문화재 범죄도 갈수록 지능화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전국 사찰의 불화가 집중 표적이 됐고, 1990년대 초에는 절터나 무덤의 석물(石物)이 많이 털렸다. "CCTV가 없어 한밤중에 묘지 앞 석물을 훔쳐가도 장물이 대놓고 유통되던 때였지요. 최근에는 조직이 점점 더 음성화되고 해외 경매 사이트를 통해 세탁하는 등 수법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1985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전국의 도난 문화재는 3만677점. 이 중 6598점(21.5%)만 회수됐다. 그런데도 단속반 인력은 2명뿐이다. 경찰과 공조수사를 하지만 한계가 뚜렷해 문화재청 내 전문 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들이 꼽는 최대의 숙제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회수. "일주일에 한 번 경북 상주에 내려가 소장자 배익기씨를 설득하고 있어요. 할 일이 태산인데 여기에만 매달릴 수도 없고… 죽겠습니다."

둘이 호흡은 잘 맞느냐 묻자 마주 보며 웃는다. "안 맞으면 일 못하죠. 반장님 노하우를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배 주무관) "제가 이 친구 소개로 아내를 만나 결혼했어요. 두 달 전 태어난 딸 얼굴도 자주 못 봐서 아내에게 제일 미안하죠."(한 반장)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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