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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손관승의 리더의 여행가방] 미니정보: 유길준과 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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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1856년 10월 24일~1914년 9월 30일)이 어윤중의 수행원 자격으로 신사유람단에 참가해 일본을 방문한 것은 1881년이었다. 그는 유람단 공식방문이 끝난 뒤 6월에 유학생 신분으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년 1월 10일 ~ 1901년 2월 3일)가 이끌던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다. 유길준은 비슷한 시기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한 윤치호와 함께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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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직후의 유길준(왼쪽 사진)과 그의 정신적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사진=위키피디아




이후 귀국하여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하는 보빙사 수행원 자격으로 미국으로 떠나 각지를 시찰한 뒤, 민영익의 권유와 후원으로 혼자 미국에 남아 한국 최초의 미국유학생이 된다. 그가 머문 곳은 동부 메사추세츠 주 셀럼 시였으며 이곳의 피바디 박물관 관장인 모스 박사의 지도를 받았다.

유길준은 유학도중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유학을 중단하고 유럽 각지를 거쳐 싱가포르와 홍콩을 거쳐 1885년 12월 귀국한다.

해외경험을 바탕으로 ‘서유견문’ 원고를 완성한 것은 1889년이었지만, 조선 내의 출판이 어려워지자 1895년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부탁해 일본 교순사에서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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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일본 최초의 견미 사절단. 후쿠자와 유키치는 26살의 나이로 견미사절단에 선발되어 서구의 문물을 수입한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다./사진=위키피디아



유길준의 행보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비슷한 게 많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최초로 1860년 견미(遣美)사절단을 파견할 때 26세의 나이로 미국을 시찰했다. 또 그는 1862년 유럽사절단에도 일원이 되어 서구각국의 문물제도를 눈여겨본 소수의 인물이며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대표적 계몽사상가다.

‘독립자존’이 그의 사상을 압축한 한마디의 말이다. 미국에서 구해온 영어 서적들을 자신의 난학숙에서 가르쳤고, 학생 수가 번창함에 따라 1868년에는 건물을 옮겨 최초의 서구식 사학을 창설했으니 그것이 현재의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의 뿌리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기 조선의 많은 개혁인사들의 사상적 지주역할을 하였고 김옥균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박영효, 최남선, 이광수 등 개화파 지식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최초의 서구식 사학을 창설하고 서구사상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저서를 발간하여 서양의 정치, 경제 사상의 도입하였기에 당시 개혁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를 이상적인 인물로 생각하였다. 특히 비슷한 입장의 유길준과는 깊은 친분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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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일본 최초의 유럽 사절단. 왼쪽에서 두 번째가 후쿠자와 유키치./사진=위키피디아



하지만 갑신정변 실패 뒤 그는 조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해 일본의 뿌리깊은 아시아 멸시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원래는 국가주의적인 것과 군국주의 적인 것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고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립을 중시했지만, 훗날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청일전쟁을 찬성하는 모순적 행동을 보였다.

그가 1885년 8월 ‘시사신보’에 기고한 논설 ‘조선인민을 위하여 그 나라의 멸망을 경하한다’는 글은 그의 사상적 변화를 잘 나타내준다. 자유민권사상가에서 대외 침략론자로 바뀌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손관승·언론사 CEO출신 저술가(ceonoma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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