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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6] 히스클리프와 캐시,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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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규나 소설가


당신이 나를 지독하게, 정말 지독하게 대접한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알겠어? 만약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고 우쭐거린다면 당신은 바보야. 다정한 말 몇 마디로 날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천치야. 또 내가 복수도 안 하고 가만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걸 곧 보여주겠어.

ㅡ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중에서.

나를 괴롭힌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증오하는 마음을 지속시키고 복수를 실행하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해야 한다. 상대를 부숴버리는 데 성공한다 해도 나 또한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다.

에밀리 브론테의 장편소설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는 주위 사람들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파멸시키는 인물이다. 고아였던 자신을 거두어준 언쇼씨가 죽은 뒤 그 아들에게 모진 학대를 받았던 히스클리프는 사랑했던 캐서린마저 린턴과 결혼하자 복수심에 불탄다. 그는 광적으로 캐서린에게 집착하며 언쇼와 린턴, 두 집안을 몰락시키지만 승리감도 잠시, 눈도 감지 못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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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두고 봐'라는 저주는 '나는 상처받았어. 날 좀 사랑해줘. 더 크게 보상해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밉다, 싫다 반복해서 불평하고 사사건건 잘못을 지적하는 이에게 호의를 갖고 그가 바라는 것을 선물해 줄 사람은 없다. 그런 일방적 순애보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어린 마음속에서만 가능하다.

부모나 조상이 당한 멸시와 고통을 되갚아주겠다는 다짐은 자손이 품을 수 있는 당연한 감정이다. 전쟁이나 외교로 틀어진 나라와 국민이 갖는 적개심도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수출 규제로 기업들은 애가 타는데 해결책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어떤 도움이 될까. 두 집안을 망가뜨린 히스클리프보다 “저는 아저씨처럼 되진 않을 거예요” 하며 사랑의 싹을 심은 캐서린의 딸, 캐시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 아쉽다.

[김규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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