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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단독] 계약서 `갑질` 당하는 문화예술인 보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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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글 책에 삽화를 더해주는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A씨. A씨는 올해 초 한 출판사와 연재 계약을 체결하던 도중 '업체는 작가가 작업한 일러스트 작품에 대해 횟수 제한 없이 수정을 요구할 수 있고, 수정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금도 지급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확인했다. 본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포함되자 A씨는 서울시 문화예술 불공정 피해 상담센터에 상담을 의뢰했고 센터는 출판사에 지난 3월 불공정 내용을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 덕분에 해당 불공정 문구가 삭제됐다.

정부가 2015년부터 문화예술인을 위한 표준근로계약서를 보급하고 있지만 여전히 문화예술인에 대한 불공정 거래 계약이 이어지고 있다. 정식으로 고용된 근로자도 아니고, 대등하게 일을 주고받는 계약 관계도 아니다 보니 사업주가 우월한 계약상 지위를 이용해 불공정 계약을 강요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최근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 제작 과정에서 스태프와 표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근로시간을 준수한 것을 두고,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가 "표준근로계약 체결이 황금종려상보다 더 놀랍다"고 말한 배경이다. 30일 서울시에 따르면 2017년 2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서울시 문화예술 불공정 피해 상담센터가 접수한 상담 건수는 총 219건에 달한다. 계약서 검토와 자문이 90건으로 가장 많았고 대금 미지급 또는 지연(60건), 저작권 침해(28건), 불공정거래 계약 강요(12건)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중 실제 피해를 구제받은 것은 14건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프리랜서 노동권익 향상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실정이다. 정재석 프리랜서네트워크 대표는 "영화와 예술 크리에이티브 업계는 얘기한 내용과 다른 일을 요구하거나 임금을 체불하는 사례 등이 매우 많다"며 "미래는 현재 프리랜서라고 불리는 독립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노동시장이 구축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해 전국에선 유일하게 작가 프로그래머 등 프리랜서 1000명을 대상으로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해 프리랜서 월평균 수입이 152만9000원이고 계약서 미작성, 사전 통보 없는 계약 해지, 임금 체불 등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다음달부터 전국 지자체 최초로 문화예술·프리랜서 분쟁조정협의회를 운영할 계획이다.

가맹점, 하도급, 대리점 등에서 이뤄진 불공정 거래 사건을 다루는 공정거래조정원에서 아이디어를 따와 문화예술 분야에서 불공정 계약건을 조정하는 창구를 만든다는 것이 골자다. 서울시는 문화예술 노동 분야 종사자, 교수, 법조인 등 전문가 최대 30명가량을 위원으로 위촉할 예정이다. 문화예술인이 조정을 신청하면 위원 3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꾸려져 90일(당사자 합의 시 30일 연장 가능) 내에 조정 대안을 검토하고 합의서를 작성하도록 권고할 예정이다. 조정 대상은 예술인복지법상에 명시된 불공정 계약, 수익 배분 지연 행위, 예술창작 활동에 대한 부당한 간섭, 저작권 침해 등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위원을 위촉하기 위해 만화가협회 등에 위원 섭외를 의뢰했다"며 "합의서가 법률상 구속력을 가지진 않지만 향후 합의 내용을 어기면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준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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