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9 (수)

과학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송민령의 뇌과학 에세이-37]

매일경제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정들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수많은 가정이 숨어 있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112에 도움을 요청하면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 열차를 타면 예정된 시간에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리라는 믿음, 온라인에서 구입한 물건이 며칠 내로 배송될 것이며 그 물건의 품질이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 등 수많은 가정을 하며 살아가고, 그 덕분에 행동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면 아무 결정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이 세상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가정은 종종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되며, 이렇게 공유된 가정에 따라 제도와 문화가 빚어진다. 예컨대 성공은 개인의 노력에 달렸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게으름이 빈곤의 원인이라고 보고 사회보장제도가 사회 정의를 해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이 미숙하다고 보는 사회에서는 청소년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대신 처벌도 약하게 한다. 부모의 본능은 자녀 양육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며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은,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동에 대한 처우, 모성·부성 지원, 발달장애 지원에 영향을 준다.

◆실험과 관찰을 통한 확인

하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아무리 논리적이고 치밀한 제도일지라도 확인되지 않은 가정에 근거하는 한, 가정에 근거한 또다른 가정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철저하게 이기적이며 보이지 않는 손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과거의 경제학이 그랬다.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 제도는 빈부격차와 독과점 등 부작용을 냈다. 최근에 등장한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을 직접 관측하며 잘못된 통념을 하나하나 확인해가고 있다.

과학은 인간에 대한 가정, 세상에 대한 가정, 세상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가정을 개선하며 사회를 바꿔 왔다. 뇌과학도 이런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청소년에게 더 많은 자율을 주는 대신 처벌도 성인처럼 강경하게 집행해 왔다. 하지만 감정을 제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전두엽이 20대 초반을 넘어가야 충분히 발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청소년에게 내리는 처벌의 정도를 완화했다.

최근에는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청소년들의 전전두엽은 성인보다 미성숙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청소년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위험에 뛰어들거나 불안증에 빠지지는 않는다. 이에 따라 어떤 사회경제적 요인이 청소년 범죄, 우울, 학습장애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뇌가 바뀔 수는 있지만 어린 시절에 비해서는 변화의 폭이 적고,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유아·아동·청소년의 뇌 발달에 투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유익하다.

사회경제적 환경과 뇌 발달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인지능력, 사회성, 감정이 밀접하게 뒤얽혀서 발달하며 어른들과의 바람직한 상호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불안정한 가정환경, 폭력이나 무관심, 영양결핍(생후는 물론 태아기 포함), 조산 등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아이는 자란 뒤에 학습장애나 감정적 불안을 경험할 확률이 높았다. 또한 건강한 아동 발달을 위해서는 산모의 정신건강을 지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기관의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직접 지원하는 것 이상으로 비슷한 환경에 놓인 가정들이 커뮤니티를 구축하도록 돕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새로운 가정이 사회를 바꾸기까지

하지만 이런 연구가 학술 논문으로 발표되기만 해서는 사회를 바꾸기 어렵다. 사회에 필요한 변화를 실제로 이끌어내려면 연구자, 정책가, 부모, 교육가, 보건의료전문가, 경제학자, 법률가 등 관련된 사람들이 빠르게 정보를 교류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공개된 논의를 통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새로운 가정을 공유해야 변화를 위한 동력이 생긴다. 학문적으로는 각광받지 못할지라도(저명한 SCI 저널에 실리기는 어려울지라도) 공공성 측면에서는 꼭 필요한 연구를 위한 지원도 늘어난다.

그래서 연구자, 정책가, 법률가, 소아과 의사 등 여러 관계자들이 모인 심포지엄이 워싱턴대에서 있었다. 출처 참고 자료는 이 심포지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노력이 더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송민령 작가(카이스트 바이오·뇌공학과 박사과정)]

출처 : SF Appleton et al. (2018) The developing brain: new directions in science, policy and law. Washington University Journal of Law and Policy 57.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