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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5 (화)

"시각장애 아동, 눈 대신 소리로 꿈 키워주고 싶어"...동화책 읽어주는 충주 女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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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할머니, 왜 울어요?"
"오늘 저녁에 호랑이가 날 잡아먹으러 온다고 해서 운단다. 흑흑흑."

지난 16일 오후 충북 충주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진술녹화실. 범인과 대질신문 벌이는 이 방에서 여청과 소속 여경(女警) 4명은 각각 동화책 속 등장인물을 나눠 맡아 구연동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맏언니 박재선(47) 경위의 감독 아래 ‘뽀뽀뽀’에서 나올 법한 맛깔나는 목소리 연기가 오갔다.

박 경위와 강지현(42) 경사, 김은지(32) 경장, 이혜민(26) 순경은 시각장애 아동들이 모여사는 충주 성심맹아원 원생들 사이에서 ‘동화책 읽어주는 경찰 이모’라 불린다. 미세먼지 심한 요즘 같은 날, 아이들은 경찰 이모가 녹음한 아홉 편의 구연동화를 들으며 하루 대부분을 보낸다.

조선일보

지난 16일 오후 충북 충주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소속 4명의 여경은 점심시간 짬을 내 이 지역 시각장애 아동들에게 들려줄 구연동화를 연습했다. 왼쪽부터 박재선 경위, 강지현 경사, 이혜민 순경, 김은지 경장. /박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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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동화 봉사활동은 막내 이 순경이 아이디어를 냈다. 이 순경은 "교회에서 성경 읽어주는 ‘목소리 기부’를 해 본 적이 있어서, 아이들한테 동화책을 읽어주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박 경위와 강 경사가 집에서 때 묻은 동화책 몇 권을 꺼내왔고, 아이들 좋아하는 김 경장이 손을 보태기로 했다.

연습 때는 곡절이 많았다. 미혼인 김 경장은 "동화는 의성어·의태어를 잘 살려야 하는데 국어책 읽듯 딱딱하게만 읽혀서 어려웠다"고 했다. "퇴근하고 집 가면 엄마 앉혀두고 ‘실감나는지 평가해달라’면서 수십번 연습했어요. ‘너 어릴 때 동화책 읽어주던 것 생각난다’면서 엄마도 재밌어 하셨죠."

강 경사는 아들에게 직접 평가를 구했다. "아들한테 ‘이정도면 눈 대신 귀로 세상 보는 친구들이 만족해 할 거 같으냐’고 물으니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어요. 머리맡에서 직접 동화책 읽어주진 못해도, 시각장애 아이들에게 비슷한 경험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지난 1월 초부터 자투리 점심시간에 진술녹화실에 모여 연습을 시작한 이들은 두달 후인 3월 말 사비로 동네 스튜디오를 빌려 9편의 동화책을 녹음했다. 음성파일은 CD에 담겨 경찰서 인근 성심맹아원에 전달됐다. 여러 번 들으면 지겨워질 법 한데도, 아이들은 요즘도 매일 "동화책을 틀어달라"며 성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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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범인 대질신문이 이루어지는 충주서 '진술녹화실'은 점심시간 마다 여경들의 구연동화 연습장소로 변모한다. 맏언니이자 초등학생 자녀를 둔 박재선 경위(맨 오른쪽)가 어린이 눈높이에 맞게 연기 톤을 정해준다. /박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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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경위는 "녹음파일 전달하고 한달 후 맹아원을 방문했는데, 소리에 민감한 아이들이다 보니 ‘저 이모가 피터팬이다’ ‘저 이모가 호랑이한테 살려달라고 빌던 할머니다’하면서 알아보는 게 신기했다"고 했다. "‘동화책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 들을 때마다 다음 동화책은 무얼 읽어줄 지 고민하게 돼요."

이들이 녹음한 구연동화가 ‘뽀뽀뽀’ 못지 않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파일을 공유해달라"는 동료 경찰도 많아졌다. 충주경찰서와 충북경찰청에 한 차례 녹음파일이 공유됐다. 조두하 충주서 여청계장은 "아이 가진 경찰들 사이에서 ‘육아 교보재로 요긴하게 사용 중이다’라는 감사인사가 종종 온다"며 웃었다.

‘동화책 읽어주기’에 다음 편은 맹아원 아이들과 함께 하는 ‘동요 합창’이다. 이 순경은 "맹아원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TV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를 듣고 있었다"며 "요즘 어린이 프로그램이 적다보니, 아이들이 동요를 들을 기회도 적어진 것 같아 함께 동요를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 합창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두달 간 연습해 오는 7월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눈이 불편한 아이들에게 더 다양한 소리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지역 청소년들에게 더 친근하고 따뜻한 ‘경찰 이모’가 되겠습니다."



[충주=박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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