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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日帝 말, 태극기 몰래 그리던 소년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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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자서전 쓰는 학생들

1943년 항일단체 활동해 옥고치른 노동훈 할아버지 찾아 인터뷰

"1944년 겨울이었소. 학교 교실에서 기말 시험을 보고 있는데, 담임 선생이 날 불러 물어요. '기미, 나니오 시타카(너,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고등계 형사들이 날 잡으러 왔다는 거요."

지난 10일 오전 광주광역시 남구의 한 아파트. 독립유공자 노동훈(92)씨가 체포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노씨는 일제강점기 광주사범학교에 다니며 항일 학생단체 '무등 독서회'를 만든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체포 당시 열일곱 살이었다.

연세대 철학과 2학년생 이현진(19)씨가 노씨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씨 등 연세대생 10명은 노씨의 자서전을 만들고 있다. 이날이 3번째 인터뷰였다.

조선일보

지난 10일 광주광역시 남구의 한 아파트에서 연세대 학생들이 생존 독립운동가인 노동훈(왼쪽)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학생들은 노씨의 자서전을 대신 쓰기 위해 이날 세 번째 자택을 방문했다. /김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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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독립유공자는 1만5511명이다. 하지만 생존 독립유공자는 노씨를 비롯해 34명뿐이다. 90세 이상의 고령이고 작년 한 해 동안 15명이 별세했다. 이씨 등 대학생들은 생존 독립유공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노씨가 첫 번째다. 작년 자서전 써 주는 사업을 하는 대학 선배의 특강을 듣고 시작한 일이다. 이씨는 "너무 늦기 전에 독립운동가들의 기억을 책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제안에 독립유공자 중 일부는 "건강이 안 좋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인터뷰를 승낙한 한 독립유공자가 별세하기도 했다. 이씨는 "노 할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함께 작업하는 연세대 사학과 이성태(21)씨는 "역사책에 나오는 유명 독립운동가는 아니시지만 할아버지 말씀을 들으면서 10대 학생들도 진지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했다.

노씨는 1943년 3월 광주사범학교 3학년 재학 때 항일 단체를 만들었다. 같은 학교 친구 10여 명과 함께 김구와 이승만 등 독립운동가에 대해 토의하다 단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몰래 모여 당시 일본이 벌이고 있던 태평양 전쟁에 대해 토론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자'는 행동 강령도 세웠다.

당시 학생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노씨는 광주 비행장 활주로 땅을 다지거나 연료로 쓸 송진을 따오는 작업에 투입됐다. 노씨 등 무등 독서회 회원들은 다른 학생들을 선동해 태업 운동을 벌였다. 태극기도 몰래 제작했다. 무등 독서회는 이듬해 발각됐다. 노씨는 "몇 달 동안 유치장에 갇힌 채 조사가 진행됐다"며 "경찰은 '다른 조직원 이름을 대라'며 고문했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풀려난 뒤 전남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1992년 정년 퇴임했다. 노씨는 "청년들이 이렇게 평범한 노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줘서 고맙다"고 했다. 연세대생들은 노씨 자서전 출판을 위한 온라인 모금을 시작했다. 이씨는 "노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최대한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권순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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