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9 (수)

“실패한 여행이 성공한 여행이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소설가 김영하 에세이 ‘여행의 이유’

“나는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은 여행자”

자신의 여행경험에 인문적 사유 더해

여행의 약탈적 측면도 아울러 봐야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문학동네·1만3500원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세를 대표하는 인문학자 에라스뮈스는 세계시민을 자처하며 “세계 곳곳이 나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다.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도처의 거리에 있다”는 말로 여행을 장려했다. 여행을 찬미하고 자신의 여행담을 글로 남긴 이들의 명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차고 넘친다. 소설가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라는 책을 내놓으며 그 대열에 합류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그후로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행장을 꾸려 여행을 떠났다.”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한겨레

<여행의 이유>는 여행을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로 삼는 김영하가 자신의 여행 경험을 바탕에 깔고 그로부터 삶과 세계에 관한 생각을 끌어낸 에세이다. 여행지의 풍광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곁들이는 여느 여행기와는 달리, 탄탄한 인문적 사유와 통찰로 무장해 읽는 맛을 준다.

책은 모두 9개 장으로 이루어졌다. 장은 여행지별로 나뉜 게 아니라, 여행이 지닌 여러 측면을 장마다 하나씩 짚어 보는 구성을 취했다. 첫 장 ‘추방과 멀미’는 뜻밖에도 여행에 실패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2005년 12월, 소설 <빛의 제국>을 집필할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고자 중국 상하이 푸둥공항에 내린 그는 공항 밖으로 나가 보지도 못하고 “난생 처음 추방자가 되어 대합실에 앉아 있는” 신세가 된다. 중국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할 것이라 막연히 짐작하고 비자도 없이 비행기를 탔다가 낭패를 겪은 일화가 카프카의 부조리 소설처럼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김영하가 처음 해외 여행을 한 것도 대학 졸업반 시절 홍콩을 경유해 상하이에 도착해 베이징 등을 둘러본 경험이었다. 학생운동에 열심이던 그와 동료 학생들을 정보당국과 기업들이 일종의 회유 삼아 내보냈던 것. 당시만 해도 사회주의 중국에 환상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감시자를 따돌리고 몰래 만난 베이징대학생과의 대화 등의 경험을 통해 환상에서 벗어났고, 운동을 그만두었으며, 결국 대학원 진학을 거쳐 소설가가 되었다.

김영하가 실패한 여행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 데에는 깊은 의도가 있다. 그가 보기에 여행기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당장 그의 경우만 해도, 2005년 12월의 여행이 그러했고 대학 졸업반 시절의 중국 여행 역시 말하자면 실패한 여행이었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목표했던 것을 모두 이루는 여행기라면 재미가 없어서 자신부터가 읽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영하가 보기에 여행의 가장 커다란 특징 중 하나는 절대적 현재성에 있다. 여행자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하는 시간과 공간에 집중하게 된다. 미루어둔 과제나 지난 일이 드리운 그림자로부터도 일시적으로는 자유롭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모든 게 현재시제로 서술된다. (…)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원경으로 물러난다.” 스토아학파가 주창하는 바와 통하는 이런 절대적 현재성은 “범속한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이라고 그는 상찬한다.

여행을 인생에 그리고 거꾸로 인생을 여행에 견주는 것이야 진부한 비유라 할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확고한 진실을 담은 생각이라 하겠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행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이 대목을 쓸 때 작가는 아마도 정현종의 시 ‘방문객’을, 무의식에서라도 떠올리지 않았을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로 시작하는 시 말이다. 이 시의 마지막에도 ‘환대’라는 말이 나오지만, 김영하가 생각하기에 인생과 여행의 가장 큰 공통점이 바로 환대의 필요성에 있다.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는 신생아와 마찬가지로 무력하고 무지하다. 그에게는 여행지의 기존 거주자들이 베푸는 환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버스가 끊긴 노르망디의 어느 겨울 저녁에,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이십여년 전 발리에서, 파업으로 열차 시간표가 엉망이 된 파리발 오를레앙행 열차 안에서 김영하는 기대하지 않았던 환대와 맞닥뜨린다. “환대의 관점에서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면,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쑥 튀어나와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받은 환대는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대신 갚으라는 것이 그의 제언이다.

여행과 닮은 것이 인생만은 아니다. 소설 쓰기 역시 여행을 닮았다. 소설은 새로운 인물과 낯선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여행과 닮았다. 새로운 소설을 쓰는 동안 소설가는 낯선 장소를 여행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소설 쓰기는 나에게 여행이고, (비록 내가 창조했지만) 낯선 세계와 인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김영하는 자신의 여행 경험담과 함께 오디세우스의 여행 이야기를 자주 사례로 든다. 오디세우스의 여행담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허영과 자만이 그를 위험에 빠뜨렸고, 반대로 겸손과 존중이 안전한 귀향을 가능케 했다는 사실이다. 군인이던 아버지 때문에 초등학교 6년 동안 여섯 번이나 전학을 해야 했을 정도로 떠돌아 다녔던 ‘원체험’이 여행자라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리라는 추측, 텔레비전 프로그램 <알쓸신잡> 출연 경험으로 확인한 ‘간접 여행’의 의미 등도 흥미롭다.

김영하는 <여행의 기쁨>의 작가 실뱅 테송의 말을 빌려 “여행은 여행자가 외부 세계에 감행하는 습격이며, 여행자는 언젠가 노획물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약탈자”라 규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이며 여행의 가치를 반어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오버투어리즘(과잉여행)에 항의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기도 하지만, 여행 자체의 착취적 성격에 대한 성찰과 반성 역시 필요한 시점이라 하겠다. 수전 손택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진다 해도 여행은 영혼의 식민주의다”라 말하기도 했는데, 여행의 부작용과 폐해에 관해서라면 천규석의 책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와 웬델 베리를 비롯한 <녹색평론> 계열 필자들의 글을 읽어 보아도 좋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네이버 메인에서 한겨레 받아보기]
[▶한겨레 정기구독] [▶영상 그 이상 ‘영상+’]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