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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장애인 차별 부추긴 일본어 ‘불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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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소외계층 연구’ 정창권 교수

“장애인 소외·차별·배제는 근대의 산물”

일제강점기 때 장애인 상황 생생히 전달



한겨레

근대 장애인사-장애인 소외와 배제의 기원을 찾아서
정창권 지음/사우·2만원

세종대왕은 2급 시각장애인이었다. 35살부터 시력이 약해졌고 45살 무렵에는 조금만 어두워도 지팡이 없이 거동하지 못했다. 조선의 시각장애인들은 점을 치는 점복가나 경을 읽어 질병을 쫓는 독경사로 일했는데, 세종대왕은 이들을 위해 ‘명과학’과 ‘명통시’라는 관직을 신설하고 시각장애인 음악가를 ‘관현맹인’으로 기용했다. 일종의 장애인 특별채용 제도인 셈이다.

양반 장애인들은 이런 특채가 아니더라도 능력에 따라 정1품까지 오를 수 있었다.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허조는 척추장애인이었다. 중종 시절 우의정 권균은 뇌전증 때문에 가끔 발작을 일으켰으나 중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휴가만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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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광해군, 인조를 거치며 영의정까지 지낸 이원익은 왜소증이었고, 영조는 청각장애인 이덕수를 청나라에 외교사절(동지정사)로 파견했다. <근대 장애인사>를 펴낸 인문학자 정창권 고려대 교수는 “조선 시대엔 거의 모든 왕대마다 장애인 관료 한두 명씩이 조정에서 일했고 그보다 낮은 직급에도 장애인이 많았다”고 썼다. 이게 그리 대단한 일인지 모르겠다면 오늘날 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 중에 장애인이 몇 명이나 있는지 상기해보라!

역사 속에서 소외된 계층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온 지은이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2005)에서 고대부터 조선까지 장애인 정책을 살펴보고,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2011)와 <한국 장애인사>(2014)를 통해 시대별 장애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장애인 소외와 차별, 배제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까진 장애인 차별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양상이 전혀 달랐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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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애인사에서 일제강점기는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이 시기 장애인 수가 급격히 늘었다. 전차와 철도, 자동차가 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교통사고’가 빈발했다. 광산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부상을 입는 등 각종 ‘산업재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태형과 고문으로 장애인이 되는 독립운동가들도 부지기수였다. 반면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은 전무했고 장애인 복지정책은 조선 시대에 비해 크게 퇴보했다. 그간 장애인들이 해오던 망건 짜기와 그물 짜기, 안경 수리 같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문명화를 이유로 점복이나 독경이 금지되면서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거리에서 구걸하는 장애인을 흔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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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장애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달라졌다. 조선 시대에 장애를 가리키는 말은 잔질, 폐질, 독질 같은 질병이었다. 민간에서는 장애인을 ‘병신’이라고도 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멸칭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병이 있는 사람’을 뜻했다. 그런데 개화기 무렵 ‘불구자’라는 말이 급속도로 퍼졌다. ‘후구샤’(不具者)라는 근대 일본어에서 온 말로 ‘기능이 결여된 인간’을 뜻한다. 장애인은 “무언가 부족하고 비정상적이며 나아가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난 ‘사회적 장애인’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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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격리해 수용하는 시설도 이 시기에 처음 생겼다. 일제는 총독부의원에 국내 최초의 정신병동을 설치하고, 소록도에 한센병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병원을 지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는 장애인 걸인을 수용하는 ‘불구자 수용소’가 들어섰다. 1930년대 우생학이 득세하면서 장애인을 사회에서 영구히 추방하려는 움직임마저 일었다. 경성제대 내과의사 김사일은 1938년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종족의 우수한 소질을 보호하고 악질의 유전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의 권한으로 장애인에 대한 단종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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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장애인사>는 각종 신문과 잡지의 기사, 일기, 외국인견문록 등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당시 장애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구체적인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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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생긴 정신병동을 탐방한 뒤 자못 열정적으로 그 낯선 풍광을 묘사하거나 1937년 한국을 방문한 헬렌 켈러를 “맹농아 삼중고를 극복한 성녀”라 칭하며 열띤 강연 분위기를 소개한 기사 등 흥미로운 자료가 빼곡하다. “여성 차별과 장애인 차별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빛나는 업적을 이룬 여성 독립운동가와 교육자, 문인 들을 만나볼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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