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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의사들은 왜 아프다는 말을 무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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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 같은 통증에도 “히스테리”

고통 무시하는 의료 권력 외면 속

자궁내막증 투병기 여성들 ‘갈채’



한겨레

엄청나게 시끄럽고 지독하게 위태로운 나의 자궁-여성, 질병, 통증 그리고 편견에 관하여
애비 노먼 지음, 이은경 옮김/메멘토·1만7000원


1600년대 일부 남성 의사들은 자궁이 여성 질병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자궁이 두꺼비 같아서 몸속에서 뛰어다닐 수 있다고도 여겼다. 1800년대 중반, 프랑스의 한 신경학자는 경악할 만한 실험을 했다. ‘난소 압축기’라는 기계로 여자들의 난소를 짓눌러 히스테리가 일어나는지 본 것이다. 의료전문가들은 윤리의식이 없었고, 여성 환자들은 취약하고 쉽게 착취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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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지독하게 위태로운 나의 자궁>은 16살 때 무능하고 가학적인 부모에게서 탈출한 뒤 국가나 사회의 별다른 보호도 없이 홀로 질병에 맞서 싸우며 살아온 한 똑똑한 여성이 가부장적 의료 시스템에 맹렬하게 저항하며 써내려간 투병기다. 지은이 애비 노먼은 전액 장학금을 받고 명문대에 입학해 공부하던 어느 날 삶을 뒤흔드는 엄청난 통증을 만났고 결국 학교까지 그만두게 된다. 의사는 이 아픔이 성관계 때문일 수 있다고 했다. “열아홉 살, 섹스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어도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걸 한번도 안 했다는 사실이다.” 의사들은 그를 신경증 환자로 몰아갔다. 죽기 살기로 의학 공부에 매진한 결과 자궁내막증임을 알게 되었고 수술까지 마쳤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지독한 고통에 휩싸이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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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궁>은 성별적인 제목을 붙이고 있지만, 환자의 아픔을 의사가 듣게 하려는 한 사람의 힘겨운 여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성정체성과 무관하게 많은 이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킬 법하다. 다만 여성들의 경우,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는 수가 많다는 점을 책은 소상히 밝힌다. 통증을 호소하는 남성 환자에게 진통제를 줄 가능성이 크지만, 여성 환자에게는 향정신성 의약품을 처방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 한 예다. 지은이가 프로이트 후예들의 편견 가득찬 의료 담론과 여성 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낱낱이 폭로하는 까닭이다.

세계적 여성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17살 때부터 실신하고 병원을 전전했지만 신경증으로 취급받아 15년 동안 간단한 검사조차 받지 못했다. 영국 소설가 힐러리 맨틀은 1970년대 자궁내막증 때문에 10년 넘게 끔찍한 통증에 시달렸지만 의사들은 ‘지나친 의욕에 따른 스트레스’라며 일을 그만두라고 하거나 안정제를 주기만 했다. “내가 몸이 아프다고 말할수록 의사들은 내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1980년대 미국 여성 희극인 길다 래드너에게 의사들은 우울증 또는 신경증이라며 비타민, 소염제, 타이레놀, 건강보충제를 처방했다. 사실은 난소암이었다. 치료시기를 놓친 그는 죽기 직전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의사들에게 이해시키려던 끊임없는 시도”가 허사였다고 밝혔다. 자궁내막증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커리어우먼의 질병’이라고 불린다. 환자들은 “애 낳아서 기르는 걸 제쳐두고 자기 미래만 생각하니까 이렇게 됐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의료 담론은 자궁의 아픔을 성적 도덕성 또는 가임력과 연결지어 환자의 삶 전체를 도마 위에 올린다. 지은이가 아이 낳을 생각이 없다는데도 의사는 부득부득 임신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고 하면서 난소 낭종을 제거하지 않았다. 절박한 심정으로 온라인 커뮤니티 ‘내 자궁에 대해 물어보세요’를 개설하자 여성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을 참고 까무러치도록 아파했지만 “진짜 아프다는 걸 의사가 믿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의사뿐이랴, 가족과 동료도 환자의 죄를 묻는 판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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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 ‘신경증’ ‘가임력’ 같은 특정 의료 담론이 개별 환자들의 삶에 끼쳐온 부정적인 영향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 이 책은 여타 ‘고통 회고록’(pain memoirs)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최신 의료 이론의 논쟁적인 지점까지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자궁내막증이 태아나 남성에게도 생길 수 있다는 점, 따라서 여성 생식기관 질환이 아니라 혹스 유전자의 비정상적 분화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설 등을 예로 든다.

의료 행위가 실제 질환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것이라기보다 특정 지식권력의 효과이며 특수한 담론의 산물이라는 미셸 푸코의 관점에서 볼 때, 지은이가 겪은 아픔은 의학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책은 당사자에게 불건강과 질병의 책임을 묻고 억울하게 심문하는 의료 담론이라는 거미줄에서 빠져나갈 사람이 실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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