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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생각보다 심각한 착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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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장류진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문장> 웹진 2019년 3월호

보통 때였다면 후쿠오카라고 해도 별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입춘이 지난 지 두 달이 넘도록 도대체 봄이 오긴 하는 건가 하는 심정으로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추위를 견디던 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호리 공원에는 벚꽃이 만발했겠지. 게다가 유후인의 노천온천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추위에 웅크리고 있던 몸이 저절로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로맨스를 만들어 보려고 후쿠오카까지 달려간 남자의 밀당(밀고 당기기) 해프닝이라면 잠시 무거운 기분을 벗어버리기에 딱 좋다.

그런데 후쿠오카에서의 이 해프닝이 과연 밀당이기는 했을까.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30대 남성 ‘지훈씨’의 일방적인 착각과 오해가 빚어낸 씁쓸한 코미디 아닌가. 스스로 밀당의 타이밍에 통달했다고 자부했으나 그는 쓸데없는 계산에 의거해 혼자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을 뿐이다. 이럴 경우 합리화마저 잘하는 인물은 상대가 빌미를 주지 않았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훈의 상대였던 동갑내기 여성 ‘지유씨’는 자신이 그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우회적으로 주지시킨 바 있다. 1년 만에 연락이 닿은 지유가 후쿠오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지훈이 충동적으로 티켓을 구매했을 때 “이렇게 추진력 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한 것은 감탄이 아니라 당황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말은 관광지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뿐 아니라 지훈에게도 한 말이었다. 애초 지훈과 지유가 친해진 것은 지훈이 쓴 영화평에 대해 지유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라고 반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웃을 수 있는 맥락과 그로부터 비롯된 웃음 코드를 공유하고 있었”다니, 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가.

그런데 또, 모든 게 착각이었을 뿐이라고 멋쩍게 웃고 말 문제도 아니다. 지유가 신혼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도 그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애도는 짧게 끝내고 그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여겼다. 공감능력 부족이다. 지유의 노트북 바탕화면 사진의 귀퉁이에 손톱만한 실루엣을 굳이 주시하며 비키니 차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것이 불편하여 엑셀파일 하나를 올려놓았더니 그것을 “이불을 덮은 듯”하다고 묘사한다. 이불이라니, 풍경과 거기에 담긴 추억 같은 것 아랑곳없이 그에게 비키니는 곧 알몸이다. 여성의 몸을 관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지유에게 제대로 차이고 나서 역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허름한 노인을 걸인으로 착각한다. 노인은 그저 커피를 마시고 있었을 뿐인데 종이컵에 동전을 던져 넣었다가 낭패를 겪는다. 자기중심적 사고가 무너지자 타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삼는 전형적인 약자폄하의 심리구조다.

간단히 사과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될 이 착각과 오해들이 얼마나 멀쩡하게 타인에 대한 무례를 범하고 폄하를 낳는지, 그것이 결국은 권력화된 사회구조에 반성 없이 순응한 결과라고 생각하다 괜히 심각해졌다. 지훈의 자신만만한 착각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음미하며 좀 더 깔깔대며 읽어도 좋았을 것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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