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삼지구대·강남서 거듭 "그런 일 없다"
광수대 "그날 지구대 출동 기록 삭제됐다"
<7월 7일 새벽, 서울 강남 ‘버닝썬’에서 ‘VIP 미성년자 손님’이 약 2000만원어치 술을 마시다 경찰에 적발됐다. 클럽은 성인만 입장시켜야 하는데, 버닝썬 측이 술값을 많이 쓰는 VIP 미성년자에게 신분증 검사없이 통과시켜주는 불법 특혜를 줬다. 이 미성년자는 예전에도 고액의 술을 마시는 조건으로 버닝썬에 출입한 적이 있다. 카드가 없어진 것을 안 엄마 신고로 역삼지구대가 출동했고, 사건을 강남경찰서로 송치했다>
지난해 7월 기자는 ‘강남의 한 클럽’에서 일어난 사건을 ‘제보’ 받았다. 매우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자는 이 제보 내용을 취재는 했지만 기사로 쓰지는 못했다. 기자의 능력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2018년 7월 8일
취재원의 제보는 매우 구체적이었지만, 동시에 ‘황당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유명 아이돌 ‘승리’가 운영한다는 버닝썬이 미성년자를 입장시켜 2000만원어치 술을 팔았다?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클럽인데 그럴 리가. 그러나 2009년 기사를 보고 나선 생각이 달라졌다. 당시 역삼지구대 일부 경찰관들이 인근 유흥업소에서 다달이 금품을 상납받고 단속을 무마해줬다가 적발됐다는 기사였다. 제보가 마냥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얘기는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7월 9일
오전10시쯤 역삼지구대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사건 당일에 근무했다는 경찰관과 통화를 했다.
"버닝썬에 미성년자 출입과 음주 관련 출동이 있었나"
"잘 모르겠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미성년자 2000만원 술값 정도면 알고 있었을텐데...버닝썬에서 들어온 신고가 전혀 없었다"
역삼지구대의 완강한 부인에 "설마, 경찰이 기자를 속이겠나?"라는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제보자에게 다시 확인을 했다. "미성년자를 경찰에 인계했던 클럽 가드 사이에 퍼진 얘기"라며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다시 역삼지구대에 전화를 걸었다. 재차 버닝썬 미성년자 출입 의혹을 물었다.
"미성년자가 버닝썬에서 엄마카드로 2000만원어치 술마셔 경찰이 출동했다는데"
"거기 미성년자는 못 들어간다"
"미성년자가 술마셔서 출동했다던데?"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금시초문이다"
"강남서로 넘어갔다"는 제보자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이번에는 강남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 전화를 걸었다. 여청과 경찰도 "버닝썬에서 미성년자 2000만원이면 액수가 커서 기억을 할텐데,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경찰이 폭력, 마약, 성폭력, 경찰 유착 등의 혐의로 승리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 클럽 버닝썬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승리, 버닝썬 입구, 역삼지구대 모습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연합뉴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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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10일 오전, 강남경찰서를 찾았다. 버닝썬에 대한 출동 기록도 어떤 단서나 증언도 찾을 수 없었다.
오후에는 역삼지구대를 다시 찾아갔다. 지구대에 들어선 뒤 정면 책상에 앉아있던 경찰관에게 "7일 새벽 미성년자가 리츠칼튼호텔(현재 르메르디앙호텔) 지하 1층 클럽에서 술을 먹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경찰관은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기자의 거듭된 질문에 경찰은 거듭 ‘없다’고 했다.
이 정도라면 경찰 말을 믿어야 하는 게 아닐까. 데스크는 "경찰이 은폐하는 것 아니냐" 기자를 몰아붙이기도 했지만, 기자는 "설마, 어느 시대인데 경찰이 거짓말을 할까" "영화에서나 나오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데스크도 더 이상 ‘쪼지’ 않았다. 그리고 기자는 (부끄럽게도) 그렇게 취재를 접었다.
8월 31일
그렇게 시간이 지났지만, 버닝썬 의혹이 머리속에 계속 맴돌았다. 사실 취재원의 제보를 기사화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도 컸다. 다시한번 확인하기로 했다.
강남서를 출입하는 후배 기자가 8월 31일 역삼지구대를 찾아 ‘버닝썬 미성년자 출입 사건’을 물었다. A팀장은 "그런 소식을 들어본 적 없다"며 "보통 미성년자가 출입하면 영업정지 처분을 받는다. 그런데 버닝썬은 영업정지 된 적이 없다"고 답했다.
2019년 2월 21일
8개월이 흘러 2019년 2일 21일 ‘영화 속에나 있을 일’이라 생각했던 게 현실이 됐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버닝썬의 미성년자 출입 사건과 관련해 강남서가 지난해 8월 증거부족으로 수사를 종결하고 불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며 "당시 수사 경찰관과 클럽 관계자 등을 불러 조사할 예정이며, 수사선상에 오른 경찰관들은 강남서 소속"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그날 역삼지구대의 출동 기록마저 공개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김철민 의원실에서 자료를 요구했지만 사건이 발생한 7월7일 내용을 누락한 채 자료를 보내왔다. 현재 김 의원실은 7월 7일의 자료를 다시 요구한 상태다. 다만 경찰은 ‘단순 실수’라고 해명했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역삼지구대의 월평균 신고건수가 2500건에 달해 키워드로 출동내역을 추출하다 누락이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기자가 취재했을 때 역삼지구대와 강남서가 “그런 일 없다”고 여러번 부인했던 이유가 있는 걸까? 경찰이 클럽과 유착한 것인지, 소문대로 클럽에서 많은 돈을 쓴 미성년자 손님이 ‘유력자의 자제’이기 때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런 일이 경찰 혼자 가능할까. ‘조직적 은폐’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버닝썬은 경찰과의 유착 외에도, 클럽 내 마약유통, 폭행및 강제성추행 등 각종 의혹을 받고 있다. 이 클럽은 문제가 불거지자 지난 16일 폐업을 공지한 뒤 다음날부터 바로 철거에 들어갔다. 디지털편집국이 ‘증거 인멸’을 우려하는 기사를 취재하자 그제서야 ‘현장 보존’을 지시했다. ‘강남서는 못믿겠다. 그런데 광수대도 못믿겠다. 다 같은 편 아니냐’ 하는 우려도 나온다. 몇달 후, 기자가 “경찰에게 또 속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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