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식당은 혼자 오는 어르신도 살갑게 대했다. 소주 반 병, 편육 반 접시를 시켜놓고 앉은 손님도 눈에 띄었다. 플라스틱병에 든 200mL짜리 소주였다. 바쁜 점심시간 테이블을 차지한 어르신이 편육 안주 삼아 소주 반 병 비우고 국수를 시킬 때까지 종업원은 군소리 안 했다. 요즘 소주 반 병, 편육 반 접시 메뉴는 사라졌지만 어르신 자리 챙기는 정성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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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개업한 을지면옥이 재개발로 철거될지 모르는 신세라고 한다. 이 자리엔 지하 7층, 지상 20층 규모 오피스빌딩과 상가가 들어설 예정이다. 서울시는 세운상가 주변을 재개발해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는다는 계획이다. 안성집, 양미옥, 노가리 골목 같은 을지로의 대표적 노포(老鋪)와 맛집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평양냉면은 몇 년 새 신세대 인기 메뉴로 급상승했다. 냉면 맛을 모르면 유행에 뒤진 구식 취급을 받을 정도다. 소셜 미디어에는 성지순례하듯 냉면집 사진이 올라왔다. 냉면 마니아라는 젊은 연예인도 잇따랐다. 가수 존 박은 "평양냉면의 심심한 맛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다. 자극 없이 꾸준히 싱거운 맛처럼 살고 싶다"는 냉면 예찬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어제 신년 간담회에서 "노포들을 보존하는 방향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사업 인가까지 내준 재개발을 어떻게 바꾼다는 건지 알 수 없다. 근처 새 고층 빌딩으로 식당을 옮기면 그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광화문 피맛골 식당들처럼 재개발로 고층 빌딩에 들어간 노포들이 예전 맛과 분위기를 못 살린 채 무너지는 경우도 꽤 있었다. 어제 점심도 빈자리 없이 손님으로 가득했다. 혹시 마지막일까 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많다. 이러다 시인 백석(白石)이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으로 노래한 평양냉면 노포를 또 잃게 될까 단골들의 아쉬움이 크다.
[김기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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