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6 (수)

[만물상] 저무는 을지로 老鋪시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여름철엔 오전 11시 넘어부터 줄이 늘어섰다.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도 차가운 냉면 한 대접 받을 생각에 20~30분을 서서 기다렸다. 서울 을지로 3가 지하철역 공구상 거리의 을지면옥이다. 희끗한 머리의 이북 실향민도 많았지만 평양냉면 좋아하는 젊은 회사원도 적지 않았다. 육수와 동치미 섞은 국물에 담긴 메밀국수의 심심한 맛은 중독성이 강했다. 성수기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다니는 동료도 봤다. 편육 한 접시에 냉면 한 그릇을 눈치 보며 얼른 해치워야 하는 여름보다 손님 뜸한 겨울에 찾는 게 단골 대접받는 비결이라고도 했다.

▶이 식당은 혼자 오는 어르신도 살갑게 대했다. 소주 반 병, 편육 반 접시를 시켜놓고 앉은 손님도 눈에 띄었다. 플라스틱병에 든 200mL짜리 소주였다. 바쁜 점심시간 테이블을 차지한 어르신이 편육 안주 삼아 소주 반 병 비우고 국수를 시킬 때까지 종업원은 군소리 안 했다. 요즘 소주 반 병, 편육 반 접시 메뉴는 사라졌지만 어르신 자리 챙기는 정성은 여전하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85년 개업한 을지면옥이 재개발로 철거될지 모르는 신세라고 한다. 이 자리엔 지하 7층, 지상 20층 규모 오피스빌딩과 상가가 들어설 예정이다. 서울시는 세운상가 주변을 재개발해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는다는 계획이다. 안성집, 양미옥, 노가리 골목 같은 을지로의 대표적 노포(老鋪)와 맛집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평양냉면은 몇 년 새 신세대 인기 메뉴로 급상승했다. 냉면 맛을 모르면 유행에 뒤진 구식 취급을 받을 정도다. 소셜 미디어에는 성지순례하듯 냉면집 사진이 올라왔다. 냉면 마니아라는 젊은 연예인도 잇따랐다. 가수 존 박은 "평양냉면의 심심한 맛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다. 자극 없이 꾸준히 싱거운 맛처럼 살고 싶다"는 냉면 예찬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어제 신년 간담회에서 "노포들을 보존하는 방향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사업 인가까지 내준 재개발을 어떻게 바꾼다는 건지 알 수 없다. 근처 새 고층 빌딩으로 식당을 옮기면 그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광화문 피맛골 식당들처럼 재개발로 고층 빌딩에 들어간 노포들이 예전 맛과 분위기를 못 살린 채 무너지는 경우도 꽤 있었다. 어제 점심도 빈자리 없이 손님으로 가득했다. 혹시 마지막일까 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많다. 이러다 시인 백석(白石)이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으로 노래한 평양냉면 노포를 또 잃게 될까 단골들의 아쉬움이 크다.

[김기철 논설위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