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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1919 한겨레] 무장투쟁 나선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다음달 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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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통신] 개시 ② 의병은 살아있다





<편집자주>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합니다. 살아 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의 역사,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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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15일 길림·경성/엄지원 기자】

“가을 깃든 압록강 너머 그대를 보내니/ 쾌히 내린 그대 단심 우리들 서약 밝게 해주네.” 만주 길림의 별이 시리게 빛나던 1919년 겨울밤, 대한광복회 만주사령관 김좌진(30)은 의형 박상진(35) 광복회 총사령이 그를 만주로 보내며 읊었던 시를 소개하다 고개를 떨궜다. “‘공을 세운 그날에 개선가 소리가 들리리라’고 했는데. 이리 허망할 데가….”

이른 나이에 국망을 지켜보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 김구(43) 선생을 비롯한 여러 의협들과 인연을 맺었지만, 김좌진에게 박상진은 한층 각별했다. 대한제국 최초의 판사시험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고사하고 투쟁가가 된 박상진은 무장투쟁과 계몽운동을 동시에 고민하는 이였다. 김좌진이 걷고자 하는 길과 같았다.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 국내 의병투쟁이 ‘박멸’당하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광복회 동지들은 육혈포 권총을 손에 쥐고 무장투쟁을 계승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박상진이 을묘년(1915) 꾸린 광복회에 김좌진이 흔쾌히 합류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의형제를 맺은 두 사람은 각각 만주와 국내에서 반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광복회원들은 만주에 군사학교를 건립하여 김좌진이 경영에 나설 수 있도록 군자금도 마련해둔 터였다. 김좌진이 만주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 정사년(1917) 8월의 어느 밤 이들은 광복회원인 기생 어재하의 집에서 이별시를 나누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그리 작별한 지 반년 만인 작년(1918) 2월, 박상진을 비롯한 국내 광복회 지도부 대부분이 일제에 일망타진당하였다는 소식에 김좌진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동지들을 가둔 감옥을 폭파하여 그들을 구출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나 동지들이 만주의 김좌진에게 바라는 바가 그것일 리 없었다. 체포된 뒤 1년 동안 감감했던 광복회원들의 공판 일자가 내달 5일로 확정됐다는 소식이 최근 들려오면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이목도 쏠리고 있다. 10년 전 의병 대토벌의 기억이 아직 선연하다. 중형이 내려질 것이 분명하다. “형벌이 가볍지 않을 것이라지요? 일본이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 사령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좌진의 탄식 “광복회 동지들이여!”

일제에 붙잡힌 박상진 총사령 등 내달 공판

의병 무장투쟁 계승 “개선가 울리리라 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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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의 후예, 광복회 정사년(1917) 11월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 부호 장승원이 총에 맞아 죽었다. 어떤 이들이 장승원을 죽였는지, 일제 경찰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건 현장에는 한지에 먹으로 쓴 경고문이 나붙었다. “너는 어찌 나라와 백성을 팔아 네 잇속만 챙기려 하는가. 이제,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하노라. ―꾸짖고 경고하는 자, 광복회.” 통쾌한 소식은 나라 잃은 민중 사이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광복회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각 지역의 부호들 앞으로 통고문을 보내 의연(기부)금을 낼 것을 요구했는데, 출연을 거부하는 반민족적 부호와 악덕 관리들이 처단 대상이 됐다. 일제 고등경찰은 “장승원은 이왕(순종) 전하의 토지를 편취한 불충한 자이며 1916년 음력 5월 하순에는 경북도 왜관에 거주하는 김요현의 처 이성녀를 불법으로 구타하여 즉사”케 하는 등 비행을 저질러 박상진 광복회 총사령이 이 같은 행동에 나섰다고 기록했다.

군자금을 모집한 광복회는 국권 회복에 나서고자 하였다. △무기 구입 △군관학교 설치를 통한 무관 양성 △의병, 해산 군인, 만주 이주민 훈련을 통한 군인 양성 △일본인 고등관리, 반역분자 처단을 위한 행형부 조직 등이 구체적인 행동지침이었다. 물론 최종 목표는 일제에 대항한 ‘무력전’이었다. 광복회원들은 군자금을 모집하려 직접 곡물상도 하고 일제 우편마차를 공격해 세금을 탈취하기도 했다. 일본인 소유 충남 직산광산을 습격한 일도 있으며 화폐를 위조하기도 했다. 조직되자마자 국내 지부 인원만 137명에 이르렀고 전국 각지 지부를 넘어 국외 만주에까지 지부를 두었다. ‘비밀사수·폭동·암살·명령엄수’를 4대 실천강령으로 한 광복회의 대담무쌍한 행동은 곧장 일경의 표적이 되었다.

시가에는 ‘광복회와 광복단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게는 거액의 현상금을 지급하며, 과거나 현재 광복단원이었을 경우에도 자수하면 일체의 죄를 묻지 않으며, 군청이나 면사무소 등에 공무원으로 채용하겠다’는 벽보가 걸렸다. 광복회원을 재워준 부락은 모조리 불태워버린다는 유언비어도 퍼졌다. 과거 의병 토벌 때와 같은 수법이다. 광복회 간부들은 장승원 사살사건 뒤 수개월 만에 대부분 체포되었다. 일제로선 의병전쟁의 악몽이 되살아나기 전에 싹을 재빨리 도려낼 필요가 있었음이 자명하다. 을묘년(1915) 11월 신출귀몰한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선생의 사형이 집행된 뒤 완전히 순치됐다고 믿었던 조선 땅에서 이토록 빨리 무력항전의 기개가 되살아날 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일제, 정미년 제천의병 토벌 때 마을 통째로 불태우고

기유년 호남의병에는 중무장선 동원 호남지역 초토화

대담무쌍 광복회 세력 키우자 “씨말리겠다” 안간힘

◇ 두 달간의 호남 의병 대학살 경술년(1910) 강제병합 전 의병을 초토화하려던 일제의 토벌작전은 잔혹무도하기 그지없었다. 정미년(1907) 충북 제천에서 일본군의 의병 토벌 현장을 목격한 영국 <데일리 메일> 특파원 프레더릭 매켄지 기자의 증언은 이러하다. “그들은 제천을 보복의 표본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온 마을을 태우기로 한 것이었다. 일본군들은 불길을 돋우어 가면서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부락민들이 피난 갈 때 남자 5명, 부인 1명 그리고 어린아이 1명은 몸을 다쳐 따라가지 못했는데 이들은 불길 속에 사라졌다. (중략) 이제 제천은 지도상에서 없어진 마을이 되었다.”

당시 일본군의 탄압은 ‘밀고’와 ‘대토벌’에 근간을 두었다. 의병장 체포에 큰 상을 걸고 각 부락에 광고하며 밀고자를 장려하고, 의병이 숨어들었던 마을이나 의병에게 물자를 지원한 마을은 무참하게 방화하였다. 정미년 7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일제가 불태운 집은 공식 집계만 6681호라고 한다. 일본군의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병오년(1906)부터 5년간 일본군 사상자는 403명이고, 의병 사상자는 2만1485명에 이른다. 민간인 사상자가 포함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다. 박상진 총사령의 스승이던 의병장 허위 선생도 의병을 일으킨 죄로 이때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는 신축된 서대문형무소의 1호 사형수가 되었다.

더욱이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기유년(1909)의 ‘호남의병 대학살 사건’은 그 참상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갑오년(1894) 봉기한 뒤 15년간 줄기차게 명맥을 이어온 호남 의병이 사실상 기유년 9월1일부터 10월30일까지의 두 달 사이에 전파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안담살이’(‘담살이’는 머슴살이를 이르는 전라도 방언)로 유명한 보성의 머슴 의병장 안규홍 대장을 비롯한 호남 지역 의병장 103명, 부하 의병 4138명이 이때 체포됐다. 안규홍 대장은 일본군을 야습해 50여명의 일본인을 처단하는 등 신출귀몰한 활약상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곡창지대인 호남의 이권이 이처럼 의병들로부터 위협받는 것을 일제가 보아 넘길 리 없었던 것이다.

대토벌 당시 일제는 대포를 탑재한 중무장 경비선 16척을 건조해 이 중 10척을 전남 도서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했고 무인도까지 샅샅이 수색하여 의병들을 붙잡았다. 수천명의 병력이 새로 투입됐다. 당시의 일을 매천 황현 선생은 이리 증언했다. “순사들이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고 가택마다 조사를 하여 조금만 의심이 나면 즉시 주민을 살해하므로, 이때부터 행인들의 종적이 끊기고 이웃 마을까지도 왕래를 하지 않았다. 한편, 의병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방으로 도주하였으나 그들이 숨을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힘이 강한 사람은 그들과 싸우다가 사망하고, 약한 사람들은 땅을 기면서 애걸하다가 그들의 칼에 맞아 사망하였으므로 의병들은 점차 그들에게 밀려나 강진, 해남 등 육지가 끝나는 곳까지 쫓기게 되었다.”

체포된 호남 의병장 103명 중 안규홍을 포함한 23명은 경술년에 처형되었다. 포로로 잡힌 의병들은 해남과 장흥, 보성, 낙안, 순천을 경유해 광양과 하동까지 도로를 놓는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이때 닦은 길을 일본군은 ‘폭도 도로’라고 이름 붙여 조롱하였다. 기유년 전체 교전 참전 인원의 60.1%를 차지했던 호남 의병은 이듬해인 경술년 고작 2.3%에 불과할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범윤·안중근 국외로…

“나는 의병장으로 죽는다” 8년간 일제 처단 채응언 등

조선의병 담대한 투쟁은 계속

◇ 의병은 살아 있다 야만적 대토벌 뒤에도 조선 의병은 후퇴했을 뿐, 패배하지 않았다. 국망을 전후하여 연해주로 터를 옮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국외 의병 봉기를 꾀하였다. 병오년 연해주로 이주한 이범윤(63) 대장이 의병부대를 꾸려 일본군에 맞섰고, 그와 뜻을 같이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안중근은 기유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수적 열세와 군자금 부족, 삼엄한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을묘년(1915)까지는 국내에서도 유격전 형태의 의병전쟁이 지속되었다. 8년여간 일제 헌병과 그 가족, 헌병 보조원들을 곳곳에서 처단하여 이름을 떨친 채응언 대장은 그해 7월 평남 성천에서 붙잡혔을 때부터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담대한 태도로 조선 민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가 평양헌병대 본부로 이송되던 날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골목마다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그를 가리켜 “사납고, 겁 없고, 담차고, 고집 센 성질이 그 얼굴에 나타났더라”라고 악의적으로 묘사하였으나, “의병을 빙자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는 자는 즉시 참수한다. 몰래 술을 먹고 떠들거나 예를 잃는 자는 즉시 참수한다”던 그의 대쪽 같은 성정은 시중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해 11월 일제가 적용한 강도·살인죄로 교수형을 당할 적에도 채응언 대장은 “나는 의병장으로 죽는다”고 말하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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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의로운 이들은 자꾸만 가뭇없이 죽어갔다. 이처럼 승산 없는 전투를 계속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어느 이방인에게 의병의 한 사람이 답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H5s기미년 1월, 투쟁한 이들은 잡혀서 죽고 투항한 이는 살아남아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들은 앞으로도 반복된다. 박상진 광복회 총사령도 오는 2월28일 강도·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신유년(1921) 8월 대구감옥에서 순국한다. 그러나 의로운 이들이 떠난 뒤에도 ‘의병정신’은 오래 살아남는다. 일제의 대토벌 뒤 술장수·엿장수·농부로 숨어 살던 의병들은 오는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면 맨 앞에서 자기 마을의 만세운동을 이끌게 된다. 박상진의 광복회 동지 김좌진은 경신년(1920)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박상진을 흠모한 21살 청년 김원봉은 장차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고관대작과 친일파를 처단하여 광복회 강령을 계승한다.♣?])



△참고문헌

―박걸순, ‘1910년대 비밀결사의 투쟁방략과 의미’, <한국독립운동사연구>(2013)

―조동걸, <대한제국의 의병전쟁>(역사공간·2010)

―김웅, <한의 독립투사 고헌 박상진>(박상진의사 추모사업회·1996)

―이성우, <김좌진>(역사공간·2011)

―프레더릭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집문당·1999)

―프레더릭 매켄지, <한국의 독립운동>(집문당·1999)

―류시중·박병원·김희곤 역주, <국역 고등경찰요사>(선인·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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