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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르네상스때나 AI때나…건축의 주춧돌은 인간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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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자 서정일 ‘문명 프로젝트 10년’

도시로 본 당대 문명의 상징체계 파헤쳐

알베르티·멈퍼드·베즐리 등

세기의 건축 전문가들 서적 번역

“세 사람 살았던 시대는 다르지만

기술공학 보단 소통·질서에 초점

다양한 학문에서 건축적 가치 찾도록

학교 커리큘럼 바꿔야할 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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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대학원에서 건축학 박사를 받은 뒤 그가 안착한 곳은 인문학연구원(서울대)이었다. 20여명의 연구원 중 어학·문학·역사학 등 인문대 출신 가운데 이공계 연구자는 서정일 박사(현재 재단법인 여시재 연구원)가 유일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휩쓴 도시개발의 광풍 속에서 시민들이 소통가능한 건축의 대안을 찾고자 했던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을 연구했던 그에게 인문학연구원이 HK프로젝트로 시작한 ‘문명’이란 주제는 또하나의 도전이었다. 인류문명의 토대이자 결과물인 건축과 도시를 텍스트 삼아 당대 사람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종교·이념·사회가치의 상징체계를 공부하고 사회의 진보를 견인해온 도시의 존재 이유를 찾고 싶어서였다. 2008년 시작한 문명 프로젝트는 지난해 9년8개월간의 여정을 마치고 마침표를 찍었다. 그동안 인문학연구원 안팎의 활동을 통해 <뉴욕 런던 서울의 도시재생 이야기>(2009) <소통의 도시>(2011), <사상가들, 도시와 문명을 말하다>(2014), <제국, 문명의 거울>(2018) 등 여러권의 저서·공동연구서를 펴낸 서 연구원은 외양이 화려한 성과는 아니나 건축학의 주춧돌이 될 만한 중요한 책들을 번역했다. <루이스 멈퍼드 건축비평선>(2014)에 이어 지난 여름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건축론>(1~3권)을 발간했고 2019년을 며칠 앞두곤 건축학계의 세계적인 석학인 달리보 베즐리의 <재현 분열 시대의 건축>을 냈다. 식견 있는 건축가들에게도 소략돼 알려져있던 알베르티의 ‘고전’ 과 두꺼운 ‘벽돌책’들을 잇따라 펴낸 서정일 박사를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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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연구원은 “알베르티(1404~72), 멈퍼드(1895~1990), 베즐리(1934~2015) 세 사람은 살았던 시대가 다르지만, 당대의 건축적 과제에 적극적으로 응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운을 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를 주무대로 성직자이자 외교관, 건축가로 활동했던 알베르티는 <회화론> <조각론> <건축론> 등을 쓸 만큼 갖가지 교양을 갖춘 대표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서 연구원은 “알베르티는 <건축론>을 통해 건축을 체계적인 ‘학술’(arts)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공화국 시민들을 위한 건축 가치를 설파하며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전개했다”며 “당시 이탈리아는 경쟁적 도시 개발로 고대 유적을 파괴하는 일이 많았다. 알베르티의 눈에는 무질서한 난개발 일색이었다. 그는 고대의 질서있는 건축문화를 재발견하고 보전해야할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질서를 창조해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고 짚었다. 멈퍼드 또한 시대적 요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서 박사는 “멈퍼드는 잡지 <뉴요커>의 건축비평 칼럼과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건축과 도시를 ‘기계’와 동일시하는 르 코르뷔제의 건축론이 결과적으로는 뉴욕의 유엔 빌딩처럼 기능적으로도 문화적 상징의 측면에서도 실패하는 결과를 빚어냈다고 분석했다. 현대 건축을 옹호하는 ‘내부자’의 시선에서 책임감있는 자세로 모더니즘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현상학을 배운 건축학자인 베즐리 교수도 ‘재현의 분열’이라는 개념으로 기술주의에 매몰되는 현대 건축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해부했다. 통상적으로 건축의 ‘재현’이란 인공물을 제작하는 과정을 가리키는데, 베즐리는 겉으로는 자유로워보이지만 사회의 맥락과 동떨어진 재현이 있는가 하면, 문화적 질서를 구현하는 재현이 있다고 말한다. 서 연구원은 “베즐리는 이 두가지 분열된 재현 속에서 건축가들은 기술적 사고에 의존하는 자유로운 표현을 넘어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고 소통시키는 문화적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가령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찾은 이들이 ‘낯섬’이나 ‘당혹감’을 느꼈다면, 이는 방문객들이 건축적 교양이나 세련미를 갖추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 건물이 지닌 소통 문제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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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티, 멈퍼드, 베즐리로부터 한국의 현대 건축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서 연구원은 “사람들은 건축가 개인의 재능이나 독창성을 중시하거나 건축을 너무 기술공학 차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인공지능·가상현실이 밀려오는 상황에서도 건축은 자연과 인간의 기본조건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 연구원은 앞으로 10권에 이르는 알베르티의 <건축론>의 나머지 부분(4~10권)의 번역에도 착수할 예정이다. <건축론>은 알베르티 사후인 1485년 라틴어 초판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11개의 언어로 옮겨졌다. 서 연구원이 번역을 위해 뒤늦게 라틴어 공부를 한 덕분에 한국어가 12번째 <건축론> 번역어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건축과 인문학이 참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건축 전공자 개인이 인문학적 교양을 열심히 쌓는 것과는 다르다. 건축학도들이 생태학, 인류학 등을 포함해 다양한 학문 분과에서 건축의 역할과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학교의 커리큘럼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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