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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이슈 강제징용 피해자와 소송

한국엔 화내면서…중국엔 ‘강제징용 화해금’ 주겠다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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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징용을 주도한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 광업의 후신(後身)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중국인 피해자들을 위한 기금을 설립하고, 최대 3765명에게 1인당 10만위안(약 1625만원)의 화해금을 지급할 계획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지난달 30일 한국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고(故) 여운택씨 등 4명이 신일철주금(일제 당시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은 여씨 등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린 뒤, 일본 정부가 비슷한 내용으로 제소된 일본 기업들에 배상과 사과 모두 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 교도통신은 5일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올해 중·일 평화우호조약체결 40주년을 맞아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화해금을 지급하기 위한 ‘역사인권평화기금’을 연내 설립한다고 보도했다. 이 기금은 중국과 일본이 합동으로 발족시키는 형태로, 중국인 피해자들을 위한 기념비 건립과 추도행사, 소재가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와 유족을 추적 조사하는 데에도 쓰여질 예정이다.

미쓰비시 머티리얼은 2014년 2월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중국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자 2016년 6월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한다. 사죄의 증거로 1인당 10만위안(약 1625만원)을 지급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화해금 지급 대상 3765명은 일본 외무성이 1946년 작성한 ‘중국인 노동자 사업장별 취로 조사 보고서’에 근거한 것이며, 미쓰비시 머티리얼은 생존 피해자 10여명에게 이미 10만위안씩 지불했다.

교도통신은 "기금이 설립되면 유족에 대한 보상금 지급이 가능해져 역대 최다인 3765명을 대상으로 한 중·일 화해 모델이 확립된다"며 "보상금이 지급되면 다른 전후 보상 문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조선일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8년 11월 1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날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구(舊)조선반도(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징용공’이 아닌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표현을 썼다. / 마이니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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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머티리얼의 기금 설립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일본 정부와 신일철주금이 보인 대응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1일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손배소를 낸 원고들은 징용된 게 아니라 모집에 응한 것이라며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이전까지 ‘징용공(徵用工·강제징용 노동자) 문제’라는 표현을 쓰던 아베 총리가 돌연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고 톤을 낮춘 것은 한국인이 강제로 노역에 동원됐다는 의미를 약화시켜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비롯해 앞으로의 사태 진전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고노 다로 외상은 지난 3일 "일본은 한국에 모든 필요한 돈을 냈으니 한국 정부가 책임지고 보상해야 한다"며 일본 기업의 자발적 배상과 사과, 피해기금 설립 등 방안에 선을 그었다. 고노 외상은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직후에도 "이번 판결은 한·일 기본 조약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며 "일본 기업에 부당한 불이익을 끼쳐 한·일 우호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부터 흔드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2012년 주주총회에서 "대법원 판결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내놨던 신일철주금 측도 일본 정부의 대응 방침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사과를 거절한 것이다.

조선일보

일본 공사현장에서 토목 노동을 하는 강제징용 노동자들. / 해외교포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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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972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며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청구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이에 일본 법원은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배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기업들은 중국인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이 아닌 화해금, 구제금 등의 명목으로 사죄하고 있다. 한국인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와는 정 반대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중국과 한국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다르게 대하는 바탕에는 일본이 1938년 제정한 국가총동원법이 있다. 일본의 한국인 강제동원은 당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적법하지만, 피침략국인 중국은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극명한 온도 차에 최근 일본 내부에서도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본 변호사 95명은 5일 공동성명을 내고 ‘한국인 강제징용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는 자국 정부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한 것은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이지 개인 청구권은 아니다"라며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아베 총리의 설명은 오도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성명 발표를 주도한 가와카미 시로 변호사는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언론 보도가 ‘한국 때리기’ 일변도로 흐르는 것에 법률가로서 위화감을 느껴 4일부터 성명 참가를 요청했다. 짧은 기간인데도 많은 이들이 참여해줬다"며 "아베 총리가 한국 대법원 판결을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고 말했는데, 이런 말 자체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박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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