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06 (토)

[Why] 나도 늙어가는지 건망증이 생겼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김형석의 100세 일기]

조선일보

가까이 지내던 동갑내기 목사 생각이 난다. 30여 년 전 일이다. 일요일 아침에 설교를 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인천까지 갔는데, 약속한 교회가 어딘지 모르겠더라는 것이다. 공중전화로 집에 있는 아내에게 물었지만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어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서, 몇몇 감리교회 주소로 전화를 걸어 "오늘 누구의 강연 요청이 있었느냐" 확인을 하곤 택시 타고 가느라 고생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60이 되니까, 나도 늙었나 봐. 건망증이 찾아온 것 같아"라며 웃었다. 얘기를 들은 나는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나는 며칠 전에 점심 먹으러 종로에 나갔다가 버스에서 내려 들어갔더니 책방이던데…"라고 했다.

사실 나는 건망증 이상의 습관이 있다. 건망증은 기억했던 것을 잊었을 때의 상태다.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그 하나가 만났거나 함께 지낸 사람의 이름이다. 내가 제자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졸업생들은 사은회를 겸한 식사를 끝내면서 내 옆까지 다가와 "선생님, 제 이름이 박○○입니다. 기억해 주세요"라고 부탁한다. 나는 "그럴게" 대답하지만 집에 돌아와 메모하려고 하면 벌써 깜깜하게 잊곤 한다. 그래서 어떤 제자들은 내가 누구의 이름을 부르면 그 제자는 대단한 친분이 있거나 유명해진 인사로 착각한다. 얼굴은 기억에 떠오르는데,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을 자주 대하곤 한다.

요사이 내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냐"고 부러워한다. 며칠 전에는 철학계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1781년에서 1831년 사이는 독일 관념론의 전성기였다"고 했더니 모두 놀라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해부터 헤겔이 죽은 해를 모르느냐"고 설명했다. 모두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강의로 몇십 년 동안 벌어먹고 살았는데, 그렇게 쉬 잊을 수가 있겠느냐'고 생각은 하면서도 내 기억력이 괜찮은가 보다고 흐뭇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습관과 생활이 현실적인 도움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정치계나 경제·사회계는 말할 것도 없고 교수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을 기억하면서 선처(善處)하는 사람들이 성공도 하고 여러 분야의 지원도 얻는다. 나같이 좁게 깊이 있는 사귐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폭넓은 후원은 받지 못한다. 인천에서 갈 곳을 잊었던 목사는 훌륭한 설교를 하는데 많은 신도를 이끄는 목회자는 되지 못했다. 나와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며칠 전의 일이다. 가까이 있는 교회당 안의 카페에서 약속했던 손님을 만났다. 나는 모 신문사의 기자로 알았기 때문에 쓰고 있던 원고 생각이 떠올라 얘기를 했다. 그 손님이 "제가 뵙기로 한 것은 원고 때문이 아닌데요"라면서 웃었다. 내가 착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미안합니다. 나도 요사이는 늙어가는 모양입니다. 건망증이 생겨서…"라고 했다.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마주 보면서 웃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