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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friday] 180㎝로 살아온 金대리 깔창을 벗어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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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키 집착 줄어드는 한국사회… "남자는 180은 돼야" 강박 버리고 작은 키 당당하게 내세워

[깔창이여 안녕]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自省 커지며 키에 대한 편견 허물어져

"키보다 더 중요한 게 많아"… 원하는 배우자 키 줄고, 키 작은 남자 아이돌도 위풍당당

직장인 유정호(32)씨는 지난 10년 동안 '거의 180㎝'로 살아왔다. 실제 키는 174㎝. 스무 살 이후로 항상 키 높이 깔창과 함께했다. 아침마다 머리 감듯 습관적으로 신발 깔창 아래 높이 5㎝ 깔창을 넣었다. 사정 아는 친구들은 "이 정도면 신발에 '탑승'한 수준"이라고 놀렸다. 신발 벗고 들어가는 고깃집에 가는 날엔 양말 안에 깔창을 넣었다. 깔창은 곧 그의 자존심이었다. 그랬던 그가 얼마 전 깔창을 버렸다. 결정적 계기는 "결국 깔창도 보정 속옷 같은 거 아니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라는 친구의 조언이었다. "당당하게 말하니 시원하더라고요. 남들이 신경 쓴다는 건 제 자격지심이란 것도 알았고요. 키에 콤플렉스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잖아요." 그는 "'탑승'했던 신발에서 내려오자 오히려 키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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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 키는 대한민국 동년배 평균(173.7㎝) 정도다. 그런데도 키를 말해야 하는 순간마다 머뭇거렸다. 어쩌다 사실대로 말하게 되면 '키가 작은 편'이라는 이미지가 박히곤 했다. 유씨는 "170㎝쯤 되는 친구들이 깔창을 끼우니 원래 내 키를 앞지르더라"며 "억울한 느낌이 들어 어쩔 수 없이 '깔창 경쟁'에 동참했던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키에 유독 집착했던 한국 사회가 변하고 있다. 키에 대한 강박을 조금씩 벗는 추세다. '(남이) 보기 좋은 키' 개념은 남아 있지만, 키가 전부는 아니란 인식이 커가고 있다. 작은 키도 당당하게 내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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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가 SM C&C 설문 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를 통해 전국 남녀 165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42.5%가 '지금 내 키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남에게 키를 속여본 적 있다'는 응답자는 30.7%였다.

선호 키도 조금 작아졌다. 많고 많은 숫자 중에서도 '180'은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숫자다. 9년 전인 2009년 일명 '루저(loser·패배자)의 난'이 있었다.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여대생이 "180㎝ 이상의 남자를 원한다. …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말한 것이다. "키 180㎝ 미만은 루저"라는 말로 퍼져 논란을 일으켰다. 요즘엔 키 작은 남자를 줄인 '키작남'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루저에 담겼던 조롱의 뉘앙스는 옅어졌고 개성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더해졌다.

180㎝는 한국 남성 키 분포에서 상위 10% 정도에 해당한다. 나머지 90%에겐 너무 가혹한 기준이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깨달은 걸까. '180 선'도 흔들리고 있다. 설문에서 응답자의 46.3%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성 키'는 176~180㎝라고 답했다. 인기 있는 키의 기준이 한 단계 낮아진 것이다.

키의 비중도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키보다 성격’ ‘키보다 능력’ ‘키보다 스타일’이라는 말이 흔해졌다. 단지 키 때문에 좌절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점점 줄고 있다. 키보다 더 중요한 게 많은 시대가 왔다.

‘큰 키’에 대한 선호는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1970년대 미국에선 키에 신경 쓰는 풍조를 지적하면서 ‘하이티즘(heightism·키 차별주의)’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정도다. 이후 하이티즘은 성차별주의(sexism), 인종주의(racism)처럼 적극적으로 배척해야 할 대상이 됐다. 40여년이 흘러 그 흐름이 ‘키 지상주의’ 만연한 한국에 상륙했다.

점점 옅어지는 '키 지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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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자 컬링 대표팀(왼쪽)과 2000년대 초반 활약한 전 프로골퍼 김미현. 컬링팀은 김초희(164㎝)를 제외한 4명의 키가 155~158㎝이지만 이들의 작은 키는 부각되지 않았다. 반면 155㎝ 정도였던 김미현에겐 늘 ‘수퍼 땅콩’이란 별명이 붙었다. /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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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욱(28)씨 키는 167㎝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166㎝로 전교에서 제일 컸다. 그땐 ‘지금 큰 편이니까 나중에 최소한 180㎝는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야속하게도 몸은 위로 더는 자라지 않았고 옆으로만 퍼졌다. 옷을 사서 줄이면 원단의 반을 버렸다. 공연장이나 만원 지하철에선 아무것도 안 보였다. 사실 그런 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를 힘들게 했던 건 주변 시선이었다.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애가 저보다 4㎝ 더 컸어요. 보는 사람마다 ‘여자 친구가 너보다 크지 않으냐’고 굳이 물어 스트레스였어요.” 지금 여자 친구는 김씨보다 2㎝ 더 크지만 굳이 키를 묻는 사람은 드물다. 김씨는 “남자가 꼭 여자보다 커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바뀐 걸 체감한다”며 “스스로도 예전엔 작은 키가 부끄러웠는데 이젠 신경 안 쓴다”고 했다.

‘키 지상주의 사회’에선 너무 큰 것도 스트레스다. 한 스타트업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김지원(26)씨는 “사람들이 나를 189㎝로만 기억하는 것이 싫었다”고 했다. “너는 그 키로” “키 큰 거랑 안 어울리게” “키 몇 cm 좀 떼주라” 같은 말을 지겹게 들었다. 김씨는 “처음 보는 사람도 키 얘기부터 했는데 이젠 키보다 다른 주제로 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외모보다는 관심사가 중요해진 걸 느낀다”고 했다.

키에 대한 생각 변화는 이방인의 시선에도 포착된다. 한국계 독일인인 다니엘 슈베켄디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두 살 때 한국을 떠났다가 2003년 한국에 돌아왔다. 처음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일상이 키 관련 이슈로 가득한 나라’였다. 가게에선 아찔한 높이의 힐을, 길거리에선 키 높이 깔창을 팔았다. 이력서에 키를 쓰는 것이 당연시됐고, 키를 수시로 재고 서로 비교했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큰 병원에 갔다가 “완벽하게 건강하게 보이는” 어린아이가 엄마 손잡고 키 크는 치료를 받으러 온 걸 보고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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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의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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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엔 요즘 키를 둘러싼 한국인의 인식 변화가 흥미롭다. 슈베켄디크 교수는 “10년 전 공동 연구에서 한국의 남자 연예인 평균 키를 180.2㎝로 추산했는데, 요즘 미디어에는 작은 키 연예인이 더 자주 등장한다”며 “한국인들이 확실히 물리적 키에 덜 주목하는 게 보인다. 키가 아닌 다른 요소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해진 것 같다”고 했다.

자녀 키 문제는 많은 부모에게 아직 고민거리지만 “아이가 키에 집착하지 않는 게 더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도 많아졌다. 중학생 남매를 둔 학부모 조은영(45)씨는 “160㎝인 중학교 1학년 아들이 ‘혹시 너무 안 크면 어떡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너무 작지만 않으면 된다’고 얘기한다. 속으로 걱정은 되지만 내 걱정이 아이에게 스트레스가 되는 건 좋지 않다고 본다”고 했다. 학부모 이윤경(44)씨는 “초등학교 6학년 딸이 159㎝인데 키가 더 안 클까 봐 주사나 약도 생각해봤지만 아이가 싫어해 관뒀다”며 “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160㎝대 남자 아이돌도… ‘180 신화’가 무너진다

과거 자신이 겪었던 키 고민이 30~40대에선 자녀 키 고민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그 자녀 세대들은 키 작은 아이돌에 열광하고 있다. 방탄소년단 멤버 지민(173.6㎝), 슈가(174㎝) 등 인기 남자 아이돌 상당수가 170㎝ 초반이고, 워너원 하성운(167㎝), 세븐틴 우지(164㎝), 블락비 태일(167㎝), 비스트 양요섭(168㎝) 등 160㎝대도 꽤 된다.

한 대형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요즘 아이돌 그룹에 키 작은 멤버가 많다. 굳이 프로필에 키나 몸무게 적어 강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물어봐도 숨기는 분위기는 아니다”며 “외국 팬은 물론이고 한국 팬도 키에 연연하지 않는다. 키가 작으면 ‘귀엽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고 좋아한다. 연습생 오디션도 키보다는 매력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몇 ㎝라도 높여 ‘프로필상 키’를 썼던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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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161㎝라고 밝힌 힙합 가수 해쉬스완(23). 키가 작지만 독특한 음악 스타일과 스트리트 패션으로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40만명 가까이 된다. / 앰비션뮤직


힙합 가수 해쉬스완(23)은 키가 161㎝라고 당당히 밝힌다. 키가 작지만 독특한 음악 스타일과 스트리트 패션으로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40만명 가까이 된다. 작은 키가 오히려 매력 포인트. “‘키작남’(키 작은 남자)이 이렇게 섹시하다니”라는 댓글이 넘친다. 힙합 레이블 앰비션뮤직 관계자는 “키보다는 그 사람이 뿜어내는 아우라나 카리스마가 더 중요하다”며 “키가 크든 작든 간에 멋있어야 의미 있다”고 했다.

학교에선 키순으로 줄 세우던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2003년 교육부가 공식적으로 키 번호 폐지를 권고한 뒤에도 비공식적으로 남아 있던 ‘키 번호’가 없어지는 추세다. 중학교 1학년 딸을 둔 학부모 장미(51)씨는 “아이가 초등학생 때부터 키 번호가 따로 없었다”며 “젊은 교사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1년에 한 번 있는 신체검사 때가 아니면 따로 키를 재지도 않는다”고 했다.

여성들은 하이힐에서 내려오고 있다. 옥션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 스니커즈 판매는 2015년보다 57% 늘었다. 같은 기간 하이힐 판매는 27%, 킬힐 판매는 39% 줄었다. 옥션 관계자는 “정장이나 치마를 입을 때도 키 커 보이는 높은 굽보다 자연스러운 낮은 굽을 신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결혼 상대로 키 큰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도 점점 옛말이 되고 있다. 평균 키는 커졌지만 선호하는 키는 미세하게나마 낮아졌다. 결혼 정보 회사 듀오가 지난 2008년 20~30대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이상적 배우자상을 조사한 결과, 남성 키는 178.4㎝, 여성 키는 신장 167.9㎝로 조사됐다. 작년 조사에서는 남성 키 177.4㎝, 여성 키 164.3㎝를 기록했다.

다원화된 사회… 키 말고도 잣대 많아

전문가들은 “‘키 지상주의’는 외모지상주의의 연장선상”이라며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과 자성이 일면서 키에 대한 편견도 허물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패션, 인성, 대인 관계 기술, 사회적 능력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다”며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방식이 달라지며 키는 그저 여러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해졌다”고 했다. 외모 판단 기준도 달라졌다. 고강섭 한국청년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외모지상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외모 평가하는 기준이 전보다 다양해졌다. 개성 있는 스타일, 화장법 등이 키 못지않게 중요해졌다. 키라는 틀에 더는 갇히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됐다”고 했다.

배규환 백석대 청소년학 석좌교수는 키를 바라보는 시선이 물리적 힘과 연관돼 있다고 봤다. 배 교수는 “그동안 사회 구성원끼리 키 큰 이가 작은 이를 상대로 우월감을 느끼는 분위기가 있었다. 위계질서에 바탕을 둔 권위주의적 문화가 외모로도 옮겨간 것”이라며 “최근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평등하다는 의식이 퍼지면서 키로 우열을 가리는 경향도 옅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성이 키 큰 남성만 찾거나, 남성이 자신보다 키 큰 여성은 싫다고 하는 건 수렵사회나 농경사회의 기준에 가깝다. 현대 사회와 맞지 않는 측면이 있었다”며 “최근 이런 분위기가 완화된 것은 바람직한 변화”라고 했다.

◆ 한국 남성 키 174.9㎝… 200개국 중 51위, 아시아에선 이스라엘 이어 2위

한국인은 자신의 키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내 키는 작은 편'이라고 느끼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한국인은 키가 상당히 큰 편이다. 주변국과 비교했을 때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friday 설문에서 '내 키는 한국 사회 평균보다 작은 편'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47.7%에 달했다. 자신의 키가 평균 수준(33.7%)이거나 평균보다 큰 편(18.6%)이라고 응답한 사람보다 많았다. 설문 응답자들의 키 분포는 한국 평균 키 분포와 비슷하다.

이런 경향은 여성들에게 두드러졌다. 여성 응답자의 15.4%가 '내 키는 평균보다 많이 작은 편'이라고 했고, 36.5%가 '평균보다 조금 작은 편'이라고 했다. 자신이 평균 수준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32.0%였다. 평균보다 조금 큰 편, 많이 큰 편이라고 답한 사람은 각각 13.8%, 2.3%였다.

키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로 한국인들은 아시아에서 키가 매우 큰 편이다. 지난 2016년 세계보건기구(WHO)와 전 세계 과학자 800여명으로 구성된 연구팀 'NCD-RisC'가 각국의 1996년생 평균 키를 조사한 '인류 신장 조사 결과'를 공동으로 발표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 남성 평균 키는 174.9㎝로 200국 중 51위, 여성은 162.3㎝로 55위였다. 아시아로 좁히면 남성은 이스라엘에 이어 2위, 여성은 레바논에 이어 2위다. 동아시아로 좁히면 1위였다. 중국은 남자 171.8㎝·여자 159.7㎝, 일본은 남자 170.8㎝·여자 158.3㎝였다. 1896년생과 비교하면 한국 남성은 15.1㎝, 여성은 20.1㎝ 커졌다.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성장 폭이 컸고, 남성은 셋째로 컸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라는 남성은 네덜란드(182.5㎝), 여성은 라트비아(169.8㎝)였다. 가장 키가 작은 나라는 남성은 동티모르(159.8㎝), 여성은 과테말라(149.4㎝)였다.

한국인 평균 키는 경제 발전과 함께 점점 커지다가 최근 정체 상태다. '인체 치수 조사사업'을 주관하는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연구 보고서에서 "지난 35년간 한국인의 체형은 키가 커지고 다리가 길어지는 등 서구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며 "2000년대 이후 이 같은 변화의 폭은 줄어들었다"고 했다.

[김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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