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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화)

[ESC] 설엔, 통통한 흥부전 바삭한 놀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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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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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면 늘 가족들이 모인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이모들과 소란스러운 사촌 동생들까지 20명가량의 대가족이다. 평소보다 많은 집안일과 요리, 각종 설거지 탓에 돌아오는 명절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고기, 튀김, 그리고 전까지. 유난히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명절에는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설거지조차 만만치 않다. 미끌미끌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주변에 튄 기름과 달걀 찌꺼기는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온다.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늘 생각했다. ‘매일 전을 부치는 이는 전 냄새가 오죽 지겨울까.’

명절마다 제사를 책임지고 진두지휘했던 엄마가 파업을 선언한 지 한 달. 어김없이 명절은 돌아왔다. 전은 물론이고 생선찜과 산적, 만두까지 직접 빚어 먹던 터라 온 가족 모두 혼란에 빠졌다. “전은 사다 먹자”고 냅다 내지르고 ‘전 맛집’, ‘전 명가’, ‘명절 맛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서울 강남구의 소문난 지하상가 전 골목, 광장시장의 유명한 전집, 으리으리한 백화점 푸드코트까지 뒤져보아도 영 눈에 차지 않았다. 투박하다 싶으면 맛이 떨어지고, 맛이 좋다 싶으면 지나치게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그때 친구가 “소문난 동네 맛집이 있다”고 으스댈 때 못 이기는 척 따라간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동네 전 맛집이 거기서 거기지’ 별다른 기대 없이 서울 강북구 수유동으로 향했다. “수유동에는 값이 싸고 맛있는 술집과 밥집이 많다”는 친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흥부전 놀부전’으로 들어갔다. “제목이 도대체 왜 이러냐”는 나의 타박을 무시하고 친구는 고추튀김 한 개, 지평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다. ‘고추전도 아니고 고추튀김은 뭘까’ 고민하고 있을 무렵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퍼지는 튀김 한 접시가 등장했다. 통통한 오이고추 안에 미트볼을 연상시키는 돼지고기와 쇠고기 반죽을 듬뿍 넣은 모양새다. ‘뜨거운 열과 기름에 고추가 눅눅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배를 가른 아삭한 오이고추에 평양만두를 빚듯 고기소를 가득 채워 넣고 주문하는 즉시 빠르게 튀겨낸다. 눅눅해질 틈도, 기름 냄새가 날 틈도 없다.

“지금 내주는 반 접시를 다 먹으면 나머지 반 접시를 가져다주겠다”는 뚝심 있는 주인의 자부심이 유난히 믿음직스럽다. 바삭한 고추튀김을 입안에 욱여넣은 뒤 새콤하고 쨍한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켰다. 초간장 소스에 들어 있는 작은 고추와 양파 조각을 건져 먹고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접시가 비었나 싶을 무렵 보너스처럼 등장하는 또 다른 반 접시가 기적처럼 느껴질 때쯤, 배가 불러도 애써 모듬전까지 주문했다. 김치전, 동그랑땡, 깻잎전 등 세상의 모든 전을 한 접시에 담아내니 조선시대 양반이 부럽지 않았다.

빵빵해진 배를 떵떵 두드리며 신나게 먹고 남은 전을 양손 가득 싸서 나오는 길, ‘대박’에 당첨된 흥부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명절에 전 타령 하는 것이 지겹다지만 명절이야말로 칼로리 스트레스 없이 마음 놓고 전을 먹을 수 있는 때다. 온몸에 밴 기름 냄새를 한껏 만끽하며 양반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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