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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일사일언] '셀피'도 예술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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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최혜진 '명화가 내게 묻다' 저자


지하철, 카페 등에서 셀피(selfie) 촬영에 몰두하는 이들과 대면할 때가 있다. 야단스러운 포즈와 연출된 표정을 본의 아니게 목격할 때 민망함을 느끼는 건 저쪽이 아니고 오히려 이쪽일 때가 많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곡된 자기 이미지를 키우는 일에 왜 저리 열심일까.

반면 자화상에는 쉽게 매료됐다. 렘브란트, 반 고흐, 수잔 발라동 등 생애 전반에 걸쳐 자기 자신을 작품 주제로 삼은 화가를 존경했다. 뭉크도 그중 하나였다. 흔히 뭉크 하면 '절규' 한 작품만 떠올리지만, 그는 유화 70여 점, 판화 20여 점, 수채화와 드로잉 100여 점에 이르는 자화상을 남겼다. 두상, 흉상, 전신상, 앉은 모습, 누운 모습, 입은 모습, 벗은 모습….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자화상을 통해 청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자신 안에 공존하는 강함과 약함을 낱낱이 기록했다.

오슬로 뭉크박물관을 찾았을 때 나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자화상과 함께 전시된 그의 셀피 때문이다. 화가로서 자의식을 폭발적으로 표출한 1903년 작 '지옥에서의 자화상'은 이듬해 나체로 찍은 셀피와 유사했고, 쇠약해진 얼굴을 기록한 1909년 작 '코펜하겐에서의 자화상'은 그 무렵 병원에서 촬영한 셀피와 다를 바 없었다. 뭉크는 '셀피 광'이었다. 침대, 욕조, 해변, 작업실 어디서든 셀피를 찍었다. 예술가다운 선언이 느껴지는 사진도 있었지만, 자아도취에 빠진 나른한 사진도 많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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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솟았다. 셀피와 자화상 모두 자기 얼굴을 통해 무형의 가치나 감정을 전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내 안에 너무도 많은 나' 중에 어떤 얼굴을 전시할지 스스로 판단한다. 그런데 왜 현대인의 셀피는 나르시시스트 놀이로 평가절하하고, 화가의 자화상은 예술로 대접하는가. 물감 짜고 붓질하는 노동이 결여되었기 때문인가, 의도한 순간만 편집해 보이기 때문인가,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은 결국 "너는 무엇이 예술을 예술로 정의한다고 믿는가?"라는 질문 앞으로 나를 끌고 갔다. 의심하고 질문하게 만드는 미술의 힘이다.



[최혜진 '명화가 내게 묻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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