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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장관한테 혼나고 나서야… '수뇌부 싸움' 사과한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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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 장관, 경찰 자체해결 불가 판단… 주말 최고간부 소집]

- 수사권 조정 앞두고 최후통첩

"국민들 걱정 넘어 분노하고 있다, 내 책임하에 철저히 조사… 일체의 자기 주장·비방 멈춰라"

이 청장·강 교장 "깊이 반성"

경찰들 "유례없는 일… 창피하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차렷, 국민께 대하여 경례."

1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9층 무궁화 회의장.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구령을 부쳤다. 경찰 제복을 입은 5명이 취재진 카메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철성 경찰청장(치안총감)과 강인철 중앙경찰학교장(전 광주지방경찰청장·치안감)·박진우 경찰차장·김정훈 서울청장·이주민 인천청장(이상 치안정감) 등 경찰 최고 수뇌부들이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전례 없는 일을 보게 됐다. 너무 창피한 마음"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차렷, 경례" 장관 구령 맞춰 대국민 사과 - 경찰 수뇌부 간‘진실 공방’에 대해 김부겸(왼쪽에서 셋째) 행정안전부 장관과 경찰 주요 간부들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철성(왼쪽에서 둘째) 경찰청장과 강인철(맨 오른쪽) 중앙경찰학교장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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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장관은 이날 오후 3시 경찰청을 방문해 전국 경찰 지휘부 화상 회의를 주재했다. 이 청장과 강 교장 사이에 벌어진 진실 공방 때문이다. 이번 사안은 강 교장의 폭로로 시작됐다. 강 교장은 지난 7일 "작년 11월 (내가 광주청장 재직 때) 이 청장이 전화를 걸어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표현한 소셜미디어 글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이 청장은 "강 교장에게 그 일로 전화한 사실이 없다"며 부인했다. 이튿날 강 교장이 자신에 대한 표적 감찰과 부당 인사를 추가 폭로했고, 이 청장은 이를 재차 부인했다.

김 장관은 이날 회의 중간에 이 청장과 강 교장에게 차례로 발언하도록 했다. 이 청장은 "깊이 반성하며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경찰 본연의 직무에 더욱 매진하겠다. 경찰 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고 했다. 말을 끝내고 이 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강 교장이 이어서 발언했다. 그는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깊이 성찰하겠다. 일련의 사안에 대해서는 절차에 따라서 공명정대하게 해소되리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강 교장이 인사 없이 발언을 끝내자, 김 장관은 "강 교장은 국민께 사과하라"고 지시했다. 강 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날 회의엔 경찰 최고위 간부 60여 명이 참석했다. 회의 시작 20분 전부터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김 장관을 기다렸다. 당초 휴일에 회의가 열리는 것을 고려해 평상복 차림 공지가 있었지만, 제복 차림으로 바뀌었다. 회의장에 도착한 김 장관은 "시국의 엄중함 때문에 의례적인 인사는 생략하겠다"며 입을 뗐다.

조선일보

1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열린 경찰 지휘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김부겸(오른쪽) 행정안전부 장관과 이철성(가운데) 경찰청장이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소셜 미디어 글 삭제 문제로 이 청장과 갈등을 빚은 강인철 중앙경찰학교장이 자리에 앉아 있다.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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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장관은 "대통령께서 지휘권 행사를 놓고 고민한 것으로 알지만, 경찰에 다시 명예 회복할 기회를 주는 게 옳다는 참모 건의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또 "당사자들은 일체의 자기 주장이나 비방을 중지하라"며 자신의 책임 아래 진실을 밝히겠다고 했다. 하지만 구체적 방안은 밝히지 않고, "다시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김 장관은 언론에 "어찌 보면 (이번 일이) 재미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경찰과 국민 사이를 이렇게 갈라놓게 되면 앞으로 대한민국은 누가 책임지느냐"고 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은 이 청장 측과 강 교장이 언론을 통해 의혹을 폭로하고 반박하며 커졌다.

경찰 수뇌부 간 갈등에 주무장관이 공개적으로 질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은 정부조직법상 행안부의 독립 외청이다. 경찰이 개별 사건에 대해선 독립적으로 수사한다. 하지만 내부 정책과 공직 기강, 경찰청장에 대한 감찰에 대해선 행안부 장관의 지시를 받는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김 장관이 '경찰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단계가 지났다'고 판단해 직접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새 정부 출범 100일도 안 돼 불거진 경찰의 내홍에 상당히 당혹스러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정부 관계자는 "청와대는 검경 수사권 조정을 통해 경찰에 힘을 실어주고 검찰을 개혁하려 했는데, 이번 일로 경찰에 수사권을 주는 것에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며 "'봉숭아 학당' 같은 일 때문에 청와대가 고민이 깊다"고 말했다.

행안부 차원의 감찰과 별도로 사태 당사자들에 대한 수사도 진행 중이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지난 8일 강 교장의 비위 사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또 정의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이 청장을 직권 남용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함에 따라 이 청장 역시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 수뇌부에서 일어난 '하극상'에 대해 누구를 탓할 수 있겠나"라며 "경찰이 치욕을 겪게 됐다"고 말했다.

[이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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