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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땅·하천으로… 폐의약품이 다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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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의약품 수거' 법적 구속력 없어 흐지부지… 환경오염 큰 우려]

- 수거량 1년새 3분의 1로 급감

지자체마다 처리 원칙 다르고 수거해가는 기간도 너무 길어

약국들은 "쌓아둘 곳 없다"… 각 가정 쓰레기에 섞여 버려져

조선일보

장면1. "오래된 약을 모아 약국에 가져갔더니 '그냥 집에서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라'고 하지 뭐예요. 환경 생각해 애써 찾아갔는데 헛심 쓴 꼴이죠." 서울 마포구에 사는 조모(69)씨는 최근 폐(廢)의약품을 들고 동네 약국 3~4곳을 찾아갔지만, "전부 수거를 거부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약국들이 마포구 약사회의 문자 메시지까지 보여주며 손을 내저었다는 것이다.

장면2. "다른 약국에서 산 폐의약품은 저희 약국에서 받아주기 어렵습니다. 다른 약국을 찾아주세요." 서울에서 5평(16㎡) 남짓한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A씨는 폐의약품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약을 어디에서 샀는지 꼭 묻는다. 이 약국이 판매한 약들만 수거하기 위해서다. A씨는 "담당 보건소가 분기에 한 번씩만 폐의약품을 걷는다. 쌓이는 폐의약품을 좁은 약국에서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했다.

◇수거 실적 '뚝'

환경오염과 약물 오남용을 막기 위해 시작한 폐의약품 수거 사업이 흐지부지되고 있다. '가정 내 폐의약품 회수·처리 사업'은 2008년 서울에서 시범 실시돼 2010년엔 환경부·보건복지부 주관하에 전국으로 확대됐다. 약국과 보건소마다 폐의약품 수거함을 비치하고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면서 폐의약품 수거량은 2009년 4만3510t에서 2014년 39만4324t으로 5년 만에 9배 남짓 늘었다.

하지만 2015년 처리 실적은 전년도 3분의 1 수준인 13만6762t으로 뚝 떨어졌다. 약국에서 수거되던 폐의약품이 다시 각 가정에서 일반 생활 쓰레기로 배출되는 경우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전성필 성남시약사회 사무국장은 "폐의약품 수거 사업은 법적 구속력이 없고 별다른 인센티브도 없다"며 "일선 약국 고충도 커지면서 수거량도 크게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더구나 지자체별로 수거 방식이 제각각이라 약국이나 주민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서울 마포구 약국들이 최근 폐의약품을 받지 않은 것도 마포구 보건소가 내린 지침을 일부 약국이 잘못 해석하면서 빚어졌다. 마포구 측은 "'약국들이 폐의약품을 종량제 봉투에 버리면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지역 약국들 편의를 봐주기로 했는데, 약국들이 '마포 주민들이 폐의약품을 각 가정에서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역에 따라 약국에 모아둔 폐의약품을 수거하러 오는 기간이 너무 길다는 불만도 나온다. 서울의 한 약사는 "약국 입장에선 뜯지도 않고 가져 오는 폐의약품 포장을 벗기고 재분류해야 하는 등 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했다.

◇환경오염 우려도 커져

폐의약품 수거 실적이 크게 떨어지면서 환경오염 우려도 다시 커지고 있다. 집에서 먹다 남은 약을 화장실 변기나 싱크대 등에 버리거나 땅에 묻을 경우 이 폐의약품이 강·토양 등으로 흘러들어가 환경오염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국내 4대강 유역에서 위궤양 등 치료에 쓰이는 시메티딘 성분이 외국의 5배 수준에 이르는 등 의약품 오염이 심각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일부 의약물질은 어류의 성(性)을 바꾸거나 물고기 기형의 원인이 되고, 특히 항생제 성분이 물에 녹으면 수퍼박테리아(다제내성균·여러 항생제를 써도 듣지 않는 세균)를 양산하는 등 보건 위험성을 높인다는 지적도 있다.

외국에선 폐의약품 관리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등 적극 조처한다. 캐나다 정부는 '폐의약품 수거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안내하고, 일부 주(州)에선 아예 '환경관리조례'를 만들어 폐의약품을 수거토록 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환경청 등에서 '지역 유해 폐기물 수거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등 폐의약품을 집중 관리한다. 국내에서도 법제화(국회 보건복지위 김순례 의원)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전문가들은 "폐의약품을 걷는 시기 등 지자체별로 제각각인 기준을 일관성 있게 정하는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성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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