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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일사일언] '검이'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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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보영 세포라 크리에이티브 총괄 디렉터


철부지 강아지로 와서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나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던 검이. 잠 못 자고 이렇게 뒤척뒤척하다 보면, 슬금 내 방으로 들어오던 녀석. 어릴 땐 비 오고 천둥 치는 밤이면 무서워서 같이 자러 들어오고, 아이가 울면 아이는 괜찮은지 보러 들어오고, 가끔은 너무 화장실이 급한데도 꾹 참고 있다가 내가 깬 걸 알아채고 얼른 나가자고 들어오고, 할머니가 돼서는 자기도 아파 잠을 못 자니까 좀 만져달라고 들어오고…. 아무리 급해도 먼저 깨우지도 않고 크게 짖지도 않고 내내 기다리기만 했다. 내가 잠에서 깬 기척이 들려야 슬금 들어와 차가운 코를 살짝 대고 그 예쁜 눈으로 "나 좀 안아줘" 하던 친구였다.

둘째가 사랑의 표현으로 터져라 안아도 꿈쩍 않고 받아주던 참을성 많던 강아지. 큰애가 너무 궁금해서 발바닥이든 입속이든 다 쑤셔보아도 낑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유전자로 생물 복제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들었을 때, 정말 심각하게 유전자를 얼려둘까 생각도 해봤다. 그러던 검이 얼굴에 혹이 생겼고 더이상 의학적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검이가 죽기 전에 꼭 같이 하고 싶은 리스트를 만들었다. 검이랑 같이 수영하기, 가족사진 찍기, 검이가 제일 좋아한 공원 다시 산책하기, 검이가 사랑한 망고·피자·아이스크림 마음껏 주기…. 하지만 그 첫 번째 리스트였던 수영을 하러 가던 날, 검이는 우리 모두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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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게 오던 눈 때문에 교통이 마비돼 1시간 반을 걸어간 강아지 입양소에서 만난 너. 너무 몸집이 크고 까매 세 시간 동안 입양을 주저하던 첫날에도, 16년간 우리에게 사랑을 주고 떠나던 마지막 순간에도 그랬다. 그 똑같은 눈으로 쳐다보면서 "나 좀 안아줘."

검이가 떠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곁에서 숨 쉬는 것 같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재생 기능'을 심어 두어 유전자 조작으로 한 복제 따위는 필요도 없게 하고 간 거였구나 싶다. 재미난 옛날 영화를 HD로 밤새 돌려 보듯이.

[이보영 세포라 크리에이티브 총괄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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