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 셰프의 생각하는 식탁] (52) 볼로네제 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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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글자는 단 하나였다. 볼로네제(bolognese). 이 글자가 들어가는 파스타를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이탈리아행 비행기를 타면서부터였다. 르네상스의 본산이라고 하는 피렌체 중앙시장의 한 식당에서 나는 공부를 하듯이 메뉴판을 읽어내렸다. 멋스럽게 필기체로 적힌 메뉴판에서 익숙한 글자를 찾은 것은 메이드 복장 점원이 빵을 가져다 놓은 다음이었다.
"볼로네제 탈리아텔레(tagliatelle)!"
나는 '유레카'를 외치듯, 그러나 띄엄띄엄 주문을 넣었다. 탈리아텔레는 칼국수처럼 넓적한 파스타였다. 점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라치에(grazie·감사합니다)!"
이탈리아에 간 이유는 두 가지였다. 파스타를 먹는다. 그리고 나폴리에서 피자를 먹는다. 로마에서 콜로세움을 보고 피렌체에서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온 두오모에 오르는 것도 물론 계획에 있었지만 먹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이탈리아 반도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며 베네치아, 로마, 피렌체와 같은 주요 도시를 훑는 '초심자' 여행 코스는 사실 미식에 최적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먹보 도시라고 불리며 볼로네제 소스가 탄생한 볼로냐와 바롤로, 바르바레스코(Barbaresco)와 같은 와인으로 유명한 피에몬테를 빼먹고 말았다. 볼로네제 소스를 맛보겠다는 일념으로 볼로냐를 일정에 넣었지만 피렌체를 빼먹으면 안 된다는 주변의 충고 덕에 막판 계획을 바꾼 것도 아쉬움이 남는다.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에 도착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놀라게 될 것이다. 우선 비싸지만 여인숙 같은 호텔, 역시 비싸지만 그저그런 식당들을 보면 이 도시에서 볼 것은 지천에 흐르는 물밖에 없는 것 같았다. 베네치아 일정을 빠르게 접고 피렌체로 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온 도시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가 그렇듯 관광객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베네치아처럼 영혼마저 퇴락한 도시는 아니었다. 과거의 유산으로 현재를 영위할지언정 그 자존심만은 여전한 것 같았다. 움푹움푹 팬 좁은 도로를 지나 옛스럽게 끝을 올린 글자체로 적힌 간판을 찾으면 실패할 확률은 낮았다. 웬만한 식당 어느 곳에서나 피렌체 특산품이라는 티 본 스테이크와 옆 도시 볼로냐가 원조인 볼로네제 파스타를 팔고 있었다. 피렌체의 티 본 스테이크는 한우와 달리 마블링이 거의 없다. 마블링이 없으면 자연히 고기가 질겨진다. 목구멍으로 한 번에 넘어가지 않으니 오래 씹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몰랐던 맛이 나온다. 이렇게 기름기 없는 고기는 핏기 없이 익히면 도저히 먹을 수 없으니 자연히 핏물이 흐르는 레어(rare)상태다. 주문할 때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스테이크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고기는 고기일 뿐이었다. 스테이크 옆에 놓인 볼로네제 파스타가 우선이었다. 덮치듯 포크를 잡기에 앞서 볼로네제 파스타를 유심히 살펴봤다. 형태를 잃은 채소는 잘게 다진 고기와 함께 면에 엉겨붙어 있었다. 아마 누군가 주방에서 오래오래 팬 앞에서 주걱을 휘저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야, 아니야. 더 오래 볶아야 돼."
영화 '시스터 액트'에 나오는 수녀 같았던 '메리사'가 나에게 선도부 선생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6년 전 호주의 한 호텔에서 일하던 시절 셀러리, 양파, 당근을 볶고 또 볶았다. 양파는 이미 투명해졌고 당근은 주걱이 스치기만 해도 물러질 것 같았다. 제일 조직이 연한 셀러리도 곤죽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프리카 어딘가 출신이었던 메리사는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에 큰 목청으로 룸서비스로 나가는 음식을 책임졌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볼로네제 파스타였다. 한번에 만들어놓고 그때그때 데워 쓰는데 하필 내가 룸서비스 지원을 나갔을 때 볼로네제 소스가 떨어졌다. 메리사는 '딱 걸렸다'는 표정으로 나를 불러세웠다. 한참 동안 채소를 볶다 간 소고기를 넣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소고기를 넣고 뭉친 것 없이 잘 펴 가며 혹시나 탈까 골고루 열심히 주걱질을 했다. 팔에 힘줄이 돋고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메리사가 선심 쓴다는 듯 "물?"이라고 물어봤지만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빈정은 상했다고! 고기가 어느 정도 익으면 우유를 붓고 끓인 다음 육두구를 갈아 넣었다. 잡맛을 없애고 향을 피워놓은 듯 고급스러운 풍미를 내기 위해서다.
"절대 많이 넣으면 안 돼. 왜인지 알아?"
메리사는 역시나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다고. 알아."
나는 왜 아는 걸 물어보냐는 뉘앙스로 앙갚음을 하듯 답했다. 육두구는 많이 먹으면 환각 효과가 난다. 하지만 향이 강해서 의도가 있지 않은 이상 많이 먹기는 힘들다. 육두구 다음에는 화이트 와인을 붓고 잘 끓인 다음 토마토 통조림을 따서 집어넣었다. 통조림 안쪽에 묻은 찌꺼기까지 물로 씻어내 넣어야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게 주방이다. 빨간물이 안 보일 때까지 싹싹 씻어 넣고 불을 최소로 낮췄다. 그 모습을 보는 메리사의 얼굴에서 내가 잘했다는 흡족함인지 본인이 할 일을 남이 했다는 만족감인지 모를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그 후로 두어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볼로네제 소스가 완성됐다. 물기가 거의 없이 진득하고 그만큼 맛도 진했다.
나는 볼로네제 소스를 입에 넣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먼저 그 시절 내가 만들어던 볼로네제 소스의 맛을 기억해냈다. 그 다음엔 입 속에 들어가 있는 볼로네제 소스와 맛을 비교해보았다. 물 건너간 볼로네제 소스는 훨씬 더 토마토 맛이 진했다. 바꿔 말하면 조금 더 달고 감칠맛이 강했다. 대개 고향을 떠나 물 건너간 음식들이 맞게 되는 변화였다. 이방인의 입맛을 사로잡아야 하니 편하고 익숙한 단맛과 감칠맛이 늘어난다. 피렌체의 볼로네제 소스는 그에 비해 맛이 담백했다. 그 여백을 소금간이 채우고 있었다. 본래 파스타는 가난한 시절 끼니를 때우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하니 소박한 차림새가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접시에 남은 소스까지 긁어먹고 나서야 식사를 마쳤다. 그 후로도 매일 같이 파스타를 먹었다. 질린다 싶을 즈음 여행이 끝났고 돌아오자마자 얼큰한 라면을 찾았다. 그리고 며칠 뒤 한밤중에 피렌체에서 먹은 볼로네제 파스타 생각이 났다. 지나간 것들,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것들을 나는 또 그리워하고 있었다.
◇광화문 몽로(02-722-8767): 꼭 현지 맛이 기준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현지 맛과 가장 비슷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을 추천하게 된다. 박찬일 셰프의 몽로는 그런 면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곳이다. 이탈리아 남부식으로 단순하지만 풍성하고 소박하지만 모자람 없는 볼로네제 파스타를 맛볼 수 있다.
[정동현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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