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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동서남북] 진실은 달팽이처럼 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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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 차장


지난 11일,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한 식당이 눈물바다가 됐다.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을 만든 이대형 예술감독과 작가 코디 최, 이완이 세계 미술평론가들의 극찬 속에 프리뷰를 마치고 기자들을 만난 자리였다. 다 큰 남자들이 이국 땅에서 눈물 흘린 건 비난과 수모로 얼룩진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서다.

비엔날레 대표작가로 선정된 직후부터 자격 시비가 일었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 있다는 억측도 불거졌다. 코디 최는 김종덕 전 문화부 장관과 미국에서 같은 대학에 다녔다는 이유로 의혹의 중심에 섰다. 성(姓)이 최씨라 '최태민의 숨겨둔 아들'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무성한 의혹과 루머는 비엔날레 준비 과정에 큰 타격을 입혔다. 대기업 후원이 끊겼고, 크라우드 펀딩을 위해 마련한 전시도 무산됐다. 정부 지원금만으로 제작비를 충당할 수 없어 집을 담보로 융자를 받고, 작품 규모도 절반으로 줄였다.

반전(反轉)은 5월 베네치아 비엔날레 현장에서 일어났다. '비엔날레가 예술? 라스베이거스 도박장과 뭐가 달라?' 일침을 놓은 코디 최의 '베네치아 랩소디'와 이완의 '프로퍼 타임'(고유시)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한국관을 보고 평론가들은 "올해 최고의 파빌리온" "놀라운 미술사적 재구성"이란 찬사를 쏟아냈다. 아트뉴스페이퍼, 아트 트리뷴 등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유력 미술지들도 앞다퉈 '주목해야 할 국가관' 톱 10·8·5에 꼽았다. 황금사자상은 독일관이 받았지만, 수상에 버금가는 관객들 호평에 세 남자는 눈물을 쏟았다. 모국에서의 자질 논란을 세계 평단이 잠재운 셈이다.

조선일보

코디 최의 '베네치아 랩소디'로 외관을 장식한 한국관이 연일 관람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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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디 최는 1990년대 뉴욕에서 제프 쿤스, 매튜 바니 등과 신개념주의 그룹으로 묶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친 작가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석고가 아닌 화장지를 뭉쳐 제작한 뒤 그 옆에서 용변 보는 행위로 패러디한 작품은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이완은 유학 경험 없는 토종 작가이지만 현대미술의 관념적 더께를 벗고 아시아 곳곳 삶의 현장에 들어가 노동한 체험을 작품으로 구현한 '메이드인' 연작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국내 인지도가 낮고, 유명대 미대 출신이 아니란 점에서 닮은 두 사람은 '주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혹독한 심판대에 올랐다.

베네치아까지 '최순실 마수'가 뻗친 게 아니라면 두 사람은 실력 하나로 그간의 의혹을 물리친 셈이다. 그사이 비엔날레 대표작가 선정회의록이 공개돼 외압이 없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코디 최는 밝아 보이지 않았다. "날 공격한 사람들은 여전히 '정의를 위한 일'이었다고 하네요. 그냥 무위도식하며 살려고요." 실제로 그는 의혹이 제기된 뒤 모든 강의 자리를 잃었다. 마녀사냥은 한 번 찍은 낙인을 쉽게 거둬가지 않는다.

그만두겠다는 두 작가를 독려해 어렵사리 한국관을 완성한 이대형 감독은 이렇게 탄식했다. "물을 마셔도 입은 24시간 말라 있었죠. 악소문은 분(分) 단위로 퍼져가는데 진실은 달팽이 속도로 기어가더군요." 목소리 큰 자들이 옳다고 윽박지르면 정의(正義)가 되는 시대. 갈 길이 보이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김윤덕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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