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영 경제부 기자 |
한 금융회사 빅데이터 담당자는 요즘 '4차 산업혁명'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했다. 관련 뉴스가 나오면 경영진이 "우리도 홍보하게 비슷한 것 좀 내놓으라"고 독촉한다. 얼마 전엔 4차 산업혁명 관련 학과를 만들겠다는 모 대학에 가서 "과학자들은 잘 안 쓰는 말인데…"라고 했다가 "이미 학과 설립을 결정한 판에 무슨 얘기냐"는 핀잔만 들었다.
A은행은 최근 4차 산업혁명 태스크포스를 만들었다. 이 은행 임원은 "새 정부의 핵심 추진 사업이라 일단 뭔지나 알아보는 중인데 쉽지 않다"고 했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영어)에 있는 정보는 1쪽 정도로 그나마 1~3차 산업혁명에 관한 내용이 절반이다. 비슷한 고민으로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경제포럼 창립자의 책 '제4차 산업혁명'을 샀다는 은행원도 자주 본다(책에도 명확한 정의는 안 나온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직무 정지 기간에 이 책을 읽었다 하고, 이어 대선 후보들이 '내가 4차 혁명 적임자'라고 일제히 주장하고 나선 즈음부터인 듯하다. 온 나라가 4차 산업혁명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슈바프의 책은 어수선하고 딱딱해서 해외 주요 베스트셀러 목록엔 들지 않은데 유독 한국에서만 무섭게 팔려 경제·경영 부문 1위에 올라 있다.
2월1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서울 영등포구 꿈이룸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 새로운 성장의 활주로' 토론회에 참석해 4차 산업혁명 관련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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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은 정부가 가장 애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지난 석 달 동안 관련 보도 자료 105개를 쏟아냈다. 채용 공고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인재'라고 단서가 달렸다. 개그맨 전유성이 나오는 지방의원 연수도 제목을 '4차 산업혁명 대응'이라고 뽑았다. 국산 한약재 판로 확대의 목표? 당연히 4차 산업혁명 선도다. 기세를 몰아 문재인 대통령은 이제 4차 산업혁명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이 위원회가 정말 생기면 한국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단 중앙 정부 조직을 가진 첫 나라가 될 가능성이 크다. 돈 냄새를 맡은 지방자치단체들도 경쟁적으로 달려들고 있다.
과거 정부가 추진했다가 힘이 빠진 녹색 성장, 창조 경제가 떠오른다. 요란한 구호가 먼저 돌진한 탓에 일시적인 과잉 투자를 유발하고는 흐지부지됐다. 이번엔 4차 산업혁명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모양이다.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의 관련 연설을 뜯어보니 인공지능·신재생에너지·창업기업·제조업·청년·70대 등등 4차 산업혁명에 안 들어간 분야가 거의 없다.
인공지능 같은 디지털 기술이 사회를 무서운 속도로 광범위하게 바꾼다는 것은 알겠다. 이런 변화가 성장 동력을 확보할 기회인 동시에 일자리 감소를 초래할 요인이리라고도 짐작은 된다. 하지만 전방위적인 기술 진보와 사회 변화를 담기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너무 모호하다. 개념 정립을 위한 공신력 있는 자료부터가 찾기 어려워 보인다. 대표적인 국제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네이처에 4차 산업혁명 관련 논문은 아예 실린 적이 없다. 만병통치약이라고 삼키기 전에 성분부터 알았으면 한다.
[김신영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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