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정당을 지지하고, 동일한 신을 믿고, 비슷한 미래를 원한다면? 분쟁도, 전쟁도 없는 유토피아 같은 세상을 꿈꾸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 현실에서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선호도가 나와는 너무도 다르고 능력도 천차만별인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아니, 오늘의 나마저 어제의 내가 원하던 것과 다른 걸 원하기도 하니, 선호도의 다양성이야말로 존재의 가장 근본적 조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선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남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을 주지 않는 한 선호도의 다양성을 절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무신론, 기독교, 불교, 이성애, 동성애, 육식주의, 채식주의 등 모두 자기 취향대로 택하는 게 가능하다는 말이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프로이센 군주 프리드리히 2세는 그러기에 "각자가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했고, 미국 헌법 역시 '행복 추구'를 인간의 기본권 중 하나로 삼고 있다.
하지만 개인의 선택과 선호도만으로는 절대 이루어낼 수 없는 행복의 조건들도 존재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채식주의자로는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만, 혼자만의 능력으론 병원도, 공장도, 인터넷도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수많은 구성원의 시간과 능력을 집합해야만 가능한 거시적 차원의 행복 조건들. 어떤 행복의 조건을 언제, 어디에, 어떻게 실현할지 합의해야 하기에 정치도, 국회의원도 필요하다. 물론 이론적인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가장 많은 구성원의 최대 효용(utility)을 가장 많이 증가시키는 사회적 선택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믿음이 현대 민주사회의 본질인 공리주의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만약 공리주의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사회의 거시적 행복이 개인의 미시적 행복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우리는 어느 행복에 손을 들어주어야 할까?
어쩌면 제대로 된 계몽주의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한민국. 이제 우리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본질적인 계몽주의적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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