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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영화 리뷰] 평온한 삶의 균열… 뜻밖의 진실을 캐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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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걸]

名匠 다르덴 형제 감독 신작… 소시민 삶 관찰하듯 들여다봐

프랑스 소도시의 저녁, 진료 마감을 한 시간쯤 넘겼을 때 젊은 의사 '제니'(아델 에넬)가 일하는 작은 병원 현관 벨이 울린다. 닫힌 문을 열지 않고 외면한 제니. 다음 날 병원 인근에서 흑인 이민자 소녀의 변사체가 발견되고, 이 소녀는 죽음 직전 병원 초인종을 누르며 도움을 청했던 것으로 밝혀진다.

조선일보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언노운 걸’에서 젊은 의사‘제니’(아델 에넬)는 죽은 이민자 소녀의 흔적을 좇다 뜻밖의 진실에 맞닥뜨린다. /영화사 오드


제니는 이 '신원 미상의 소녀(unknown girl)'에게 이름을 찾아주려 홀로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 그 돌출 행동 때문에 타인에 대한 무관심 속에 유지돼온 마을의 평온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튕겨내거나, 비난하거나, 위협한다. 이 소녀는 누구이며 왜 죽은 걸까. 제니가 원하는 것은 '진실'일까, 아니면 자신의 죄책감을 덮을 '속죄'일까.

다음 주(5월 3일) 개봉하는 '언노운 걸'은 벨기에 출신 장 피에르·뤼크 다르덴 형제 감독의 신작. 형제는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2차례 등 총 7개 상을 함께 받은 명장(名匠)이다. 이들의 카메라는 늘 소시민의 표정과 삶에 일어난 작은 균열을 관찰하듯 들여다본다. 점점 벌어지는 그 균열의 틈새에서 관객은 각자 뜻밖의 진실을 캐낸다.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가 가진 독보적 힘이다.

이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소녀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그 죽음과 연루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들 "나와 무관한 일"이라며 입을 굳게 다문다. 작은 병원은 성당 고해소 같다. 의사 제니는 집집마다 찾아가는 사제(司祭)처럼 부지런히 방문 진료를 다니며 기회 있을 때마다 진실을 묻는다. 낮에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며 뿌리치던 이들이 늦은 밤 혹은 새벽 시간에 그녀를 찾아온다. 병원 초인종을 누른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면, 그들은 고해소에 들어선 신자처럼 각자 숨겼던 사실의 조각을 꺼내 놓는다. 무관심, 값싼 욕정, 가족을 지키려는 발버둥…. 일상에 숨은 편견과 이기심의 이면을 이토록 깊이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가치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으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다르덴 형제 감독의 시선은 여전히 유효하고, 그 울림은 크다.

진료실이나 환자의 방 같은 좁은 공간에서 오가는 대화를 응시할 때, 다르덴 형제 감독의 카메라는 흔들리는 사람의 내면처럼 가늘게 떨린다. 어디에 흔들리지 않는 삶이 있을까. 사람은 늘 유혹인 줄 알면서 빠져들고, 죄인 줄 알면서 저지르며, 두렵기 때문에 아파한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내일이 없을 것 같은 끝에 다다르더라도 다시 시작할 기회는 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때로는 그 나직한 목소리가 어떤 위로보다 가슴을 친다. 상영시간 106분, 12세 관람가.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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