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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지배 지식동맹 무너뜨린 ‘지민’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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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삼성백혈병·광우병 촛불시위·황우석·4대강

현장연구로 분석한 사회학자 김종영

정치엘리트-지식엘리트 ‘부당동맹’

이에 맞서 싸운 ‘시민 지식인’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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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의 탄생-지식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정신의 도전
김종영 지음/ 휴머니스트·2만원


“우리는 지금 협동적 지성으로 무장한 지민의 탄생과 이들이 주도하는 지식민주주의의 도래를 목도하고 있다. 지식인의 시대가 가고 지민의 시대가 왔다.”

2015년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 탄생>으로 깊은 인상을 준 사회학자 김종영 경희대 교수의 두번째 책 <지민의 탄생>은 이렇게 끝맺는다. 지민(知民)이 무엇인가? 지식인으로서의 시민이자 시민으로서의 지식인이란 의미의 조어인데, “공적 이슈와 사회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참여하는 똑똑한 시민”을 가리킨다. 특히 이 책에서 지민은 “정치엘리트와 지식엘리트의 부당한 동맹에 맞서 싸우는 시민과 대항전문가들”이다. 지은이는 정치엘리트와 그들의 대리인인 지식엘리트들을 국가 중심의 ‘지배지식동맹’으로 묶고 시민과 대항전문가들 즉 지민들을 그들에 저항하고 맞서 싸우는 ‘시민지식동맹’으로 묶어 세운다. 이 책은 그들간의 대결을 ‘지식정치’라는 관점에서 지난 10여 년간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주요 분쟁들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지식정치란 “사회적 투쟁의 과정에서 지식 자체를 둘러싼 갈등·경합·타협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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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김종영은 황우석 사태, 4대강 사업, 미국쇠고기수입반대 촛불문화제 등의 사례로 ‘지민’과 한국의 지식정치를 분석했다. 사진은 2005년 12월 서울대학교 수의대학에서 황우석 박사의 지지자들이 진달래 꽃길을 만들어 황 교수의 지지를 표명하고 있는 모습.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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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4부로 짜여진 이 책 각 부의 제목이 바로 한국 지식정치장에서 벌어진 주요 이슈였다. ‘삼성 백혈병과 반올림운동’, ‘광우병 촛불운동과 탈경계정치’, ‘황우석 사태와 과학정치’, ‘4대강 사업과 지식 전사들’. 김 교수가 책 말미에 쓴, “우리는 지금 (…) 지민의 탄생과 이들이 주도하는 지식민주주의의 도래를 목도하고 있다”는 선언적 결론은 대통령 파면으로 끝난 최근의 탄핵사태를 두고 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 4개의 분쟁을 둘러싼 지배지식동맹과 시민지식동맹간의 갈등과 경합, 타협을 현장연구를 통해 치밀하게 분석한 끝에 내린 것이다.

예컨대 그는 제1부 1장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반올림)운동의 형성과 전개, 2장에서 삼성백혈병 사태의 지식정치를 다루는데, 반도체 직업병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발견되고 정치화되는지를 노동자 건강을 둘러싼 정치·경제·과학·법률적 관계들 속에서 분석하면서 피해자들이 어떻게 불리한 상황에 몰리다가 법정투쟁을 거쳐 타협에 이르는지 보여준다. 중요한 건 지배지식동맹과 시민지식동맹 경합과정. 즉 질병과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객관적 증거를 요구하는 실증주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사실상 사태축소 내지 책임회피로 일관하는 삼성 쪽의 고용(청부)과학과, 실제 피해를 토대로 한 현장 중심 대항전문가의 과학이 어떻게 맞부딪쳐 가는지 꼼꼼하게 추적한다. 그리하여 전문가들조차 이길 수 없다던 싸움에서 반도체 직업병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세계 최초의 사례”를 만들어낸 삼척의 택시 운전사 황상기(희생자 황유미씨 부친)씨가 탈경계의 대표적 지민으로 거듭나게 되는 상황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나머지 분쟁들도 각각 2개의 장으로 나눠 비슷한 방식으로 분석한다. 시민지식동맹의 그 모든 싸움들은 결코 쉽지 않은 “처절한 싸움”이었다.

지은이는 철저한 현장연구를 수행했다. 거리와 강의실, 국회, 언론사, 연구실, 케이티엑스(KTX), 산과 강, 유사한 사례나 전문가들을 찾아 국내외 현장 등을 종횡으로 누볐고 이를 종합해 르포나 에세이 형식으로 담아낸다. 가볍지 않은 주제임에도 책이 통상적 학술서와 달리 잘 읽히는 것은 이 현장성과 에세이식 글쓰기 덕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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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여학생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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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촛불시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운동과 비운동, 전문가와 시민, 일상과 과학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혼성적·탈경계적 운동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이것이야말로 최근 탄핵 촛불시위의 선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혼성적·탈경계적 특성은, 지민이 기존 시민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그 능력과 권리를 더욱 확장함으로써 새로운 “지적·정치적 주체”로 떠오르게 한 핵심 요소다. 김 교수는 지민이 출현하는 조건으로 “정보화 시대의 급격한 진전, 관료기구의 모순과 생활정치(하위정치)의 부상, 지식(정보)의 국제적 유통, 전문가체제의 분열, 고등교육의 보편화” 등을 든다.

대통령 파면으로 종결된 탄핵 촛불시위는 이들 분쟁을 거치면서 새로운 주체로 떠오른 지민, 곧 시민지식동맹 역사의 연장이요, 그것이 그야말로 불가역적인 시대의 진행방향임을 종합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분수령일 수 있겠다. 지배지식동맹과 시민지식동맹간 대결을 축으로 풀어낸 그 분쟁들은 마치 탄핵 촛불시위의 예고편같아 보인다. 아마도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탈고하는 바람에 책에는 담지 못한 얘기를 하려는 듯, 보도자료에 붙여 정리한 글에서 지은이는 3월의 탄핵을 “똑똑한 시민들의 힘을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정치엘리트들과 지식엘리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능함과 추악함을 보여주었다면서, 특히 김기춘·우병우·안종범·김종·김종덕 등을 지목해 그들은 시민들의 지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며, 촛불혁명은 공적 신뢰와 민주주의를 배신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엘리트들과 결탁한 그들의 부당한 동맹을 무너뜨렸다고 했다. “이 역사적 사건처럼 지민은 시민과 지식인의 지적 위계를 전복시키고 자신들의 지식으로 판단하고 참여하는 적극적 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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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26일 저녁 경북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낙동강살리기사업 낙단보 공사장에서 포클레인들이 준설 작업을 하고 있다. 상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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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87년체제’ 30년 만에 이뤄진 이번 탄핵이 지식엘리트들이 아니라 모든 계층과 세대를 아우른 지민들의 평화적 거사였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도약한 것이라 평가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다중적 독점체제로 인한 적폐들을 청산과제로 안고 있다며 전근대적 보수 엘리트 중심의 정치권력 독점, 재벌 중심 경제권력 독점, 서울 중심 공간권력 독점, 서울대 중심의 지위권력 독점, 가부장 중심의 젠더권력 독점, 분단체제로 인한 이데올로기 독점을 대표적 적폐로 들었다. 이들 적폐로 길들여진 ‘독점 아비투스’를 청산해야 하며, “이번 촛불혁명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고 그는 썼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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