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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핀란드 스타트업은 얼음 바다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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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핀란드 중부 노키아의 도시 오울루

한때 세계 정보기술 ‘성지’로 불렸지만

노키아 쇠락에 고용 1만→2천명 급감

오울루도 핀란드도 암담…성장률 마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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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핀란드 중북부 도시 오울루. 저녁 6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극지방이어서 어둠은 이미 짙게 내려앉았다. 발트해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인구 25만명의 이 작은 도시가 오후부터 들썩이고 있었다. 얼어붙은 발틱해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주변은 영화제 입장 하는 곳마냥 빨간 카펫을 깔았다. 여러 곳에 조명과 카메라가 설치됐고, 공중에는 카메라를 단 드론이 날아다녔다. 발트해에 낸 얼음 구멍은 낚시를 위한 게 아니다. 바로 벤처투자자들의 관심과 투자를 이끌어내려는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들어갈 곳이었다. 올해로 네 번째 열리는 스타트업의 사업 발표 행사 ‘폴라 베어 피칭(Polar Bear Pitching) 2017’이 열리는 현장이다.

주최 쪽 배려로 행사 시작 전 세계 각지에서 온 기자들이 잠시 발트해의 얼음물을 체험할 기회를 갖게 됐다. 모두가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대체 얼마나 차가운지 궁금했다. 체감상으로는 1분이 넘었지만 겨우 30초 정도 견뎠다. 그 얼음물에 들어가자마자 ‘여기서 도대체 몇 분을 견뎌야 한다고?’라는 생각과 함께 고함이 터져나왔다. “미쳤어!”

잠시 뒤 시작한 폴라 베어 피칭이 시작됐다. 18팀의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얼음물 그 자체인 발트해에 몸을 담근 채 4분 안팎의 발표를 하고, 이를 본 심사위원들이 즉석 심사를 한다. 마지막 선정회의를 거쳐 1위를 뽑는다. 1만유로(약 1200만원)의 상금과 2주 동안 미국 실리콘밸리 혁신 기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첫번째 발표 주자로 나선 이는 핀란드 헬싱키에 살지만 언 바다에 들어가본 적 없다는 미카 비탈라였다. 차량 공유 시스템 스타트업 패러데이를 운영하는 비탈라는 “석달 전 이 행사를 알고 바로 신청했다. 뭐 이런 희한한 피칭 행사가 있지 했는데, 와 보니 분위기가 대단하다. 좋은 결과를 얻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수 기술력 바탕 재기 노력
절망 뒤로하고 스타트업 요람으로 부활
북극곰처럼 발트해에 ‘첨벙’ 투자유치 스피치
불리한 환경 극복 의지가 경제 부활의 원동력

도대체 이 도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이런 기상천외한 스타트업 발굴 행사를 시작한 것일까? 이 행사를 처음 기획한 미아 켐팔라의 설명을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2013, 2014년은 오울루에게 힘든 시기였어요. 노키아가 핸드폰 사업을 매각한 뒤였죠. 약 1만명이 노키아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그 수는 2천명으로 줄었죠. 회사를 그만둔 엔지니어가 쏟아졌어요.” 노키아가 잘나갈 때 휴대폰 생산시설과 연구·개발시설이 있는 오울루는 세계 정보통신기술의 ‘성지’로 떠받들어질 정도였다. 그런 노키아가 쇠락한 뒤 거기에서 일하던 여러 분야 전문가들은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뛰어난 전문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스타트업이 많이 생겨났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들은 엔지니어의 언어로 소통했죠. 투자자들이나 소비자 등이 지켜보는 대중적인 자리에 서야 할 때가 있었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워 했어요.” 그는 핀란드의 환경을 떠올렸다고 했다. 보통은 감추려고 하는 핀란드의 어둠과 겨울, 추위 같은 것을 활용한 마케팅을 시작하자 마음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희한한 스타트업 발표 행사 아이디어를 접한 기업 스폰서들과 투자자들이 큰 관심을 보여 2014년 2월부터 얼음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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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아는 휴대전화 사업 매각 뒤 사업 규모가 크게 줄었지만 통신 네트워크 장비 분야에서는 선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노키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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켐팔라가 이야기한 대로 핀란드의 산업을 이야기할 때 노키아를 빼놓기 어렵다. 노키아가 핸드폰 사업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한 뒤 핀란드인들 사이에서도 ‘노키아는 망했다’는 인식이 강했다. 핀란드 수출의 20%를 담당하고 휴대전화 시장점유율 40%에 육박하던 노키아였다. 그러다 스마트폰 시대에 뒤처져 쇠락의 길을 걷게 됐으니 ‘망했다’는 표현은 일부 맞다. 적어도 핸드폰 사업 부문에 있어서는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노키아는 통신네트워크장비 산업에서는 에릭슨 등과 함께 아직 업계 선두주자 자리에 있다. 아직 상용화는 먼 기술이지만 5세대(5G) 이동통신 기술에 있어서도 한 발 앞서나가고 있다. 오울루에 있는 노키아의 생산·연구시설 분위기는 꽤나 활기찼다. 방문 직전인 2월13일에는 5세대 이동통신 기술 테스트에 성공하기도 했다. 노키아는 케이티(KT)와 협력해 곧 있을 평창겨울올림픽에서 5세대 통신망을 선보일 계획이다.

노키아 전성시대 이후의 핀란드 경제는 비관적일 법한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스스로는 노키아에서 일하다 나온 사람이라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많다. 오울루에서 만난 스타트업 사업가 울프강 비쿨라는 “수없이 많은 스타트업이 노키아 쇠락 뒤의 선물이라고 부르곤 한다”고 말했다. 기술혁신청을 비롯해 핀란드 정부는 스타트업 육성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중이다. 이어 기술·경영·예술 등의 분야가 합해진 혁신 대학으로 꼽히는 알토대학, 노키아 및 다양한 스타트업과 함께 성장기지로 나아가고 있는 오울루대학 등의 산-학 협력 열기도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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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주위의 북극해가 얼어붙으면 쇄빙선이 출동한다. (왼쪽 사진) 핀란드 헬싱키 공항에서 눈은 문제되지 않는다. 수십년 간 축적한 공항 유지 기술 스노하우(Snowhow) 덕분이다.(오른쪽) 악티아 제공, 핀란드공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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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핀란드 산업계는 그들이 가진 극한의 환경을 하나의 기회로 삼고 있다. 대표적으로 그런 산업 분야가 쇄빙선 산업과 공항 산업이다. 핀란드 주변의 북극해는 겨울마다 얼어붙는다. 수출 물량의 90%를 선박으로 실어날라야 하는 핀란드 기업들에게 쇄빙선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헬싱키공항을 경유하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가장 짧은 노선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겨울이 문제다. 눈이 많이 올 때는 2m까지 쌓인다. 그러나 헬싱키공항에 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핀란드공항은 이같은 시설 유지 기술을 ‘스노하우’라고 이름짓고 관련 노하우를 축적해 가고 있다.

극한의 환경을 낙담이 아니라 기회의 이유로 삼는 것은 핀란드인들의 고유한 기질처럼 보였다. 핀란드 사람들은 이같은 극한 환경 극복의 의지나 인내를 가리켜 ‘시수’(sisu)라고 한다. 얼음물에 몸을 담그고 견뎌내는 것,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작은 스타트업부터 시작해 나가는 것, 얼음과 눈이 내리는 겨울을 기회 삼아 최고의 기술을 쌓아가는 것, 이 모든 것이 시수의 예에 속한다. 핀란드의 경제성장률은 2012~2015년 마이너스를 기록하다 지난해 우상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2016년 3분기 경제성장률은 1.6%를 기록했다. 당분간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분간은 어렵겠죠. 그래도 좌절하지 않아요. 그게 우리의 힘이죠.” 얼음물을 향해 달려가는 스타트업 사업가 캐스파 라스티카가 외치듯 말했다.

오울루/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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