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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대법, 항소심 ‘유죄근거’ 반박 없이 막연히 “증거 능력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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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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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국정원 대선 개입’ 파기환송 논리 보니

트위터 계정 담긴 파일 2개

항소심은 ‘업무상 문서’로 판단

44쪽에 걸쳐 증거능력 논증

대법은 “업무상 문서 아냐”

달랑 1장으로 증거능력 부인

민변 “상식에 반하는 판결”


대법원이 16일 원세훈(64)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해 공직선거법 위반죄와 국가정보원법 위반죄를 함께 인정한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면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재판은 원점으로 회귀했다. 이에 대해 기계적이면서도 자의적인 법논리에 빠져 진실을 외면한 판결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17일 낸 성명에서 “상식에 반하고, 고려할 만한 다른 사정들을 애써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며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성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대법원의 사건 파기 이유는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김아무개씨의 메일함에서 압수된 ‘425지논’과 ‘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파일에 적힌 트위터 계정들로 쓰거나 퍼나른 글 16만여건이 ‘무력화’되면서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11만여건만으로 사건의 실체를 판단해야 한다. 대법원이 두 파일을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본 논리는 간단하다. 작성자로 지목된 김씨가 검찰에서는 작성 사실을 인정했으나 법정에서 이를 부인했기 때문에 파일 내용을 신뢰성 있는 증거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작성 사실을 부인해도 형사소송법에 따라 ‘업무상 필요로 작성한 통상문서’나 ‘특히 신용할 만한 정황에 의하여 작성된 문서’라면 증거로 쓸 수 있으나, 대법원은 그렇지도 않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논리가 너무 단순하고, 결론에 방해되는 사실과 판단은 아예 무시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내용 중 상당 부분은 그 출처를 명확히 알기도 어려운 매우 단편적이고 조악한 형태의 언론 기사 일부분과 트위터 글 등으로 이뤄져 있다”거나 “여행·상품·건강·경제·영어공부·취업 관련 다양한 정보, 격언,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경조사 일정 등 신변잡기의 정보도 포함”돼 있다며 업무상 통상적으로 작성된 문서가 아니라고 정의했다. 단 한장 분량으로 이런 결론을 밝혔다.

하지만 대법원은 항소심이 44쪽을 할애해 ‘업무상 통상문서’로 판단한 근거와 논리는 전혀 반박하지 않았다. ‘425지논’ 파일은 2012년 4월25일부터 12월5일까지 거의 매일 내용을 추가 정리한 문건이었다. 작성 날짜가 빈 때는 휴일뿐이었다. 이에 항소심은 사실상 업무일지 성격을 갖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시큐리티’ 파일에 기록된 날짜와 장소, 트위터 계정 등은 휴대전화 기지국 분석을 통해 진실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파일엔 ‘1128수내역 홀리’, ‘125금천 투썸’ 등 날짜와 지역, 커피숍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나오는데, 김씨의 휴대전화 추적을 통해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파일에 이름이 두 글자씩 적힌 22명 역시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5팀 요원 22명의 명단과 일치했다. 더구나 파일에 들어 있는 트위터 계정들로 막대한 양의 대선 및 정치 개입 글이 작성된 사실이 확인됐고, 증거로 인정된 문서들에 있는 트위터 계정들과 ‘시큐리티’ 파일에 있는 계정이 다수 일치하는 점도 확인됐다. 국정원 직원들도 이 파일에 적힌 계정들을 썼다고 법정에서 인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또 “당사자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들어 있고 ‘신변잡기’적 내용까지 포함된 것까지 보면 파일 내용의 신빙성이 더 높아진다고 봤다. 하지만 똑같은 내용을 두고 대법원은 “업무를 위한 목적으로만 작성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는 판단을 밝힌다. ‘업무’라고 볼 수 없는 대목이 있어 증거능력이 의심스럽다며 형식적 논리를 편 것이다.

대법원은 앞서 ‘성매매 여성들이 상대 남성의 아이디와 전화번호 등을 정리한 메모리카드’, ‘선거운동원들을 모집, 관리하기 위해 출결을 기록한 파일’, ‘업무수행 자금 지출내역을 적어놓은 수첩’ 등을 ‘업무상 문서’로 보고 증거능력을 인정한 바 있다.

민변은 “대법원은 항소심의 사실 확정에 대해 아무런 오류도 지적하지 않은 채 막연히 그 증거능력을 부정했다”고 지적했다. 한 검사도 “업무일지에 개인적 얘기가 많으면 오히려 신빙성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며 “신빙성을 높이는 내용을 근거로 증거능력을 부정한 것을 보고 황당했다”고 말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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