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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일)

[일사일언] ‘야구 기록’이 내게 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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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기록원’ 자격증을 갖고 있다. 야구광 남편을 따라다니다 함께 야구에 빠져버렸다. 18년 전 신혼 때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남편이 뛰는 경기장에 가서 ‘1회말 1루타’ 이런 식으로 경기 내용을 일일이 노트에 적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답답했던지 누군가가 “야구 경기 기록법을 알려주는 강습회가 있으니 한번 배워보라”고 추천해줬다.

KBO(한국야구위원회)에선 매년 시즌 개막 전에 강습회를 여는데 사흘 동안 공식 기록지를 작성하는 법과 함께 각종 세세한 야구 규칙 등을 배울 수 있다. 교육 마지막 날엔 실제 경기를 보면서 기록지를 작성하는 테스트를 받는다. 과정을 수료하면서 성적 우수자에게 주는 자격증을 받았다.

이후 야구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경기를 보면서 직접 기록지를 작성하고, 다음 날 신문에 나오는 기록과 비교해 보거나 사회인 야구 경기에서 기록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야구장 직관을 하지 않고 중계 음성만 들어도 공 하나로 운명이 갈리는 야구의 묘미를 누구보다 진하게 즐길 수 있었다. 소득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큰 즐거움을 안겨준 자격증이었다.

그사이 세상도 크게 변했다. 18년 전 야구 기록원 자격증을 딸 때만 해도 야구장에선 여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제는 여성 팬들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프로 야구의 인기를 이끌고 있다. 사회인 야구의 위상도 달라졌다. 유튜브를 통해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영상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즌 말 각종 대회는 라이브 중계까지 한다. 선수들은 기록 플랫폼에서 자신의 성적도 확인할 수 있어 프로 선수가 된 것 같은 기분을 갖는다. 자연스럽게 기록원의 역할도 중요해지고 있다.

내가 야구 기록에 진심인 것처럼 사회인 야구 선수들도 정말 진지하게 경기에 임한다. 프로 선수처럼 화려한 기록은 아니지만 평범한 동호인 한 명 한 명의 기록이 소중하게 기록되고 보존된다. 야구 경기에 프로만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세상은 평범한 개인이 쌓은 작은 축적이 모여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아림 세종문화회관 공연제작 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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