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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의 ‘지금, 이 문장’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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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서련 l 철원에서 태어났다. 2015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호르몬이 그랬어’ ‘나, 나, 마들렌’ ‘고백루프’,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 ‘마법소녀 복직합니다’ 등이 있다. 한겨레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지난 주말에 어떤 공식 입장문을 읽었다. 얼마 전 사회적 물의를 빚은 연예인의 억울함과 그가 처한 입장을 상세히 밝히는 글이었다. 본문에서 그 글이 쓰여야 했던 배경과 목적은 읽히지만, 동시에 글이 스스로의 작성 목적을 이루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후반부엔 치명적인 오·탈자까지 있었다. 이래서 고위 공직자나 기업 대외홍보 부서에서 대필을 따로 두는 것이겠구나, 뜬금없는 감상을 가져볼 만한 부분.



한겨레

교정의 요정 l 유리관 지음, 민음사(2024)


내 생각에 이런 종류의 산문 대필은 소설가에게 맡기는 편이 효과적이다. 주어진 자료를 가지고 선후 관계를 재배치하며 독자가 납득 가능한 새로운 서사를 창출해내는 일이니 어지간한 문장가로는 안 되고, 소설가 아니면 시나리오 작가를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실제로 소설가에게 입장문 대필을 시킨다고 칠 때, 원고료는?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내가 그 작업을 청탁받는다면, 나는 최소 얼마에 내 영혼을 팔려고 할까? 길지 않은 생각 끝에 나는 나뿐 아니라 어떤 소설가도 그 작업을 하려 하지 않을 거란 결론에 다다랐다. 어떤 법률가들이 법 기술자 되기를 자청했다고 해서 소설가도 서사 기술자로 전락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를 교정공이라 일컫는 ‘교정의 요정’ 작가의 글을 보면, 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글에서 기술적으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주는 교정공의 손을 거친 글은 ‘잘 쓴 글’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글이 담고 있는 내용까지는 교정공도 어쩌지 못한다. “이런 세계에서 뭘 잘 쓰려고 든다는 자체가……” 때로 저자이고 동시에 교정공인 작가의 탄식이 의미심장하다.



그러고 보면 큰 일이 있어 입장문을 써야만 할 때 필히 고용해야 할 사람은 소설가가 아니라 교정공인 것 같다. 입장이야 마음껏 쓰시되 발표 전에는 반드시 교정공의 도움을 받으시길 권하고 싶다. 물론 그런 글을 고치다 교정공의 속이 터져버리면 당연히 산재 처리는 해 주셔야 하고….



박서련 작가



한겨레

박서련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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