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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7 (목)

주 52시간제를 망친 범인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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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특혜 반도체 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이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반도체 연구개발 직종에 대한 특별연장근로 인가 확대 지침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반올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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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반도체산업이 쏘아 올린 주 52시간제에 대한 공격에 중소기업계까지 가세하면서, 노동시간 제도가 후퇴하며 흔들리고 있다. 한 보수 논객은 최근 “주 52시간제는 엉터리 통계에서 출발한 잘못된 규제”라고까지 주장했다. 통계가 잘못 활용될 수 있다는 말에는 공감한다. 내란수괴 혐의자를 구속에서 풀어주는 현란하고 뻔뻔한 법 기술 말고도, “자백할 때까지 데이터를 고문하는” 현란하고 끈질긴 통계 기술도 존재한다. 실제로 2023년 한국개발연구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를 대상으로 한 회귀분석을 통해 한국의 노동시간이 긴 이유는 자영업자가 많고 시간제 노동이 적기 때문이라는, 그의 주장과 유사한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회귀분석은 그 자체로 인과관계를 상정할 수 없으며, 대략의 추세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자영업자를 포함한 모든 취업자의 노동시간이 임금노동자보다 짧은 소수의 예외적인 국가에 속한다. 2023년 전체 취업자의 연간 실노동시간은 1872시간이었지만, 임금노동자는 조금 더 긴 1874시간 일했다. 자영업자가 늘어나면 노동시간이 오히려 더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2023년 주당 36시간 미만 일하는 우리의 시간제 노동 비중은 17.3%로, 높은 편에 속한다. 같은 해 프랑스는 우리보다 낮은 12.6%가 시간제 노동에 종사했지만, 임금노동자의 연간 실노동시간은 1389시간에 불과했다.



노동시간의 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시간의 양극화이다. 평균 노동시간이 같은 주당 35시간이라 해도, 대다수가 주당 35시간 일하는 국가와 15시간의 초단시간 노동과 55시간의 초장시간 노동으로 나뉜 국가 간 삶의 질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지난해 1~17시간 일한 초단시간 노동자는 무려 250만명으로 급증했고, 2023년 기준 주당 53시간 이상 일한 초장시간 노동자의 비중도 10.8%나 된다. 선진국에서는 통계로 잡히지 않는 주 53시간 대신 주 48시간 이상으로 계산한 비중은 17.9%로, 이는 발전된 산업 국가의 평균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주 52시간제가 도입된 전후인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주 52시간제 도입 효과에 대한 경제협력개발기구 경제학자의 분석을 보면, 노동시간의 제한으로 주 40시간 일하던 노동자의 비중이 감소하고 41시간부터 52시간 사이로 일하는 노동자의 비중이 증가했다. 노동시간이 기업 내부적으로 재조정되었을 뿐, 장시간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 것이다. 물론,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와 종속적 자영업자에게는 아무 의미 없던 규제였기도 했다. 주 52시간제와 함께 급격하게 확대되기 시작한 특별연장근로는 현 정부에서 더욱 심하게 남용되었고, 반도체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인가 기간 확대로 정점을 찍었다. 어쩌면 주 52시간제는 시작과 동시에 무너져 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주 52시간제를 망친 범인은 너무나 긴 기간 기업 규모별로 도입을 유예하고 행정부에 남용의 기회를 준 그 제도 자체일 것이다. 교섭창구 단일화를 통해 산별 단체교섭을 형해화하고, 사업장의 모든 주요 결정권을 노동조합과 사용자가 아닌 법이 틀어쥔 결과이기도 하다. 대기업은 노동시간 단축의 비용을 더 작은 하청 기업에 떠넘기고, 떠넘길 곳 없는 그 먹이사슬의 맨 마지막 30인 미만 사업장의 비명은 다시 제도 자체를 무너뜨리는 데 이용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이미 1919년에 주 52시간이 아닌 주 48시간을 초과하지 말 것을 협약에 명시했다. 1910년대, 전쟁으로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한 영국 군수품 공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주당 49시간 이상 근무하는 경우 생산성이 급격히 둔화하였고, 53시간 이상 근무하면 생산성 증가 효과가 사라지거나 감소했다. 당위성과 편의성을 이유로 법과 행정 관료에게 맡겨진 노동시간 단축의 과제를 다시 산별 노조가 되찾아와, 적어도 주 4일제의 도입은 산업 전체의 노동자가 혜택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면 한다. 기업이 원하는 것이 항상 경제에 좋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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