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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물 입힌 부침 두부… 맛을 기억하게 하는 그의 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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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부부가 둘 다 놀고 먹고 씁니다]

맛을 기억하게 하는 요소

“내가 아이였을 때 우리 집 식탁에는 소금과 후추 통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몹시 가난했고, 아무리 가난해도 많은 가정이 집에 소금과 후추 통을 놓아둔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없었다. 많은 밤에, 우리는 저녁으로 식빵에 당밀을 발라 먹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음식이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대학에 가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바닷가의 루시’ 중 한 대목이다. 루시는 이혼한 전남편 윌리엄과 팬데믹 상황을 같이 보낸다(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매일 루시에게 음식을 해주던 윌리엄이 어느 날 저녁 식사 후에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루시는 맛있다고 답을 하고,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던 때를 떠올린다. 가까운 친척을 포함해 집안에서 처음 대학생이 된 루시는 대학에서 친구가 고기에 소금과 후추를 갈아 뿌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따라 했다. 그리고 비로소 소금과 후추가 만드는 맛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었다고 회상한다.

소설 ‘바닷가의 루시’의 주인공 루시는 고기에 소금과 후추를 더해 먹는 것만으로 음식이 맛있다는 느낌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김은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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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을 읽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음식이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을까? 대단한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고 고작 소금과 후추를 더해 고기를 먹었을 뿐인데, 루시는 성인이 될 때까지 오로지 생존을 위한 식사를 했다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맛과 관련한 나의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나 역시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음식에 대한 호불호의 기준이 생겼다. 그 전에는 끼니 해결과 사교를 위해 입에 집어넣는 것이 음식이었다. ‘미식’이란 개념도 몰랐다.

대학 졸업 때까지 내가 경험한 음식이라고는 엄마가 해준 밥과 반찬, 그리고 친구들과 같이 먹은 학교 주변 음식점의 군것질거리가 고작이었다. 엄마의 음식 솜씨는 나쁘지 않았지만 해주는 음식은 밥, 국, 김치와 제철 채소 반찬이 고작이었고 특식이라면 잡채나 냉면, 짜장면 정도였다. 특히 엄마의 김치 맛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그럼에도 난 이 음식들을 두고 ‘맛있다’라고 기억하진 않는다.

나의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억의 시작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처음 들어간 직장의 ‘어른들’이 사주시던 고급 음식점의 화려하게 차려진 요리들을 나는 맛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그 음식들의 정확한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걸 먹을 때의 식당 분위기와 아름다운 상차림만 떠오른다. 나의 이런 기억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음식은 시각과 미각, 공간에 대한 느낌 등 다양한 요소가 합쳐질 때 비로소 ‘맛있다, 맛없다’라는 평가를 얻게 되는 것 같다.

대학생이 된 루시가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은 고기를 맛있다고 느낀 것 역시 맛에 대한 기억만은 아닐 것이다. 일리노이주 콩밭과 옥수수밭 사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 최초의 대학생이 되었다는 감격과 깨끗하고 환한 대학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제법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느꼈을 약간의 뿌듯함 등이 음식 맛에 복합적으로 투영되었을 것이고, 난생처음 여유로운 식사를 했던 경험 또한 새로운 맛을 인지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남편과 나는 ‘고노와타(해삼 내장)에 소주 한잔 하실래요?’라는 문자 메시지로 연애를 시작했다. 이날 우리는 광어회에 해삼 내장을 찍어 먹었다. 좋은 음식점이었으니 맛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맛은 고급 술집의 음식이 아닌 ‘2차 술자리’로 혼자 살던 남편이 집으로 데려가 직접 차려낸 안주다. 그는 두부를 작게 썰고 계란물을 입혀 부쳐서 술상을 차렸다. 두부는 수분을 빼고 들기름에 부치고 양념장을 얹어 먹는 게 제일 맛있다. 그러나 그날 계란물을 입힌 두부는 내게 아주 강렬했다. ‘남자가 술안주를 만들어 내놓는구나, 이런 남자라면 괜찮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했으니 말이다.

최근 남편은 나에게 ‘우리가 입맛이 비슷해서 정말 다행이야’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남편은 육류를 좋아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은 나의 입맛에 따라 육류보다는 해산물과 채소류를 주로 먹게 되었다. 먹는 음식이 바뀌었는데 그가 우리 입맛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은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야 달랑 둘인데 둘이 기분 좋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향으로 그의 입맛이 바뀐 것이다.

지난해 여름 우리 부부는 보령으로 이사했다. 이사 전에 ‘보령 한 달 살기’를 했는데 그때 우린 보령의 음식에 매료되었다. 특별하진 않지만 분식점에서 김밥을 먹어도 담근 김치를 내어주는 그 정성에 반했다. 당시 지방 이주를 계획하고 있던 터라 별 고민 없이 보령에서 살자고 의견을 모으고 현재는 정착할 목적으로 보령시 원도심에 작은 단독 주택을 사서 수리 중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기내식’이다.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담겨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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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곳을 정할 때 음식이 조건이 되진 않지만 여행 목적지를 정할 때 음식은 매우 강력한 동기가 된다. 누군가 내게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 물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기내식’이라고 말한다. 비행기에서 먹는 음식이 뭐 대단하겠나? 하지만 일상을 떠나 여행을 간다는 설렘은 비행기 안에서 주는 음식조차 맛있게 만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러니 너무 맛을 좇지 말자. 유명한 음식점에서 줄을 서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식성을 배려할 줄 아는 식구(食口)를 만들자. 그런 의미로 오랜만에 남편에게 계란물 입힌 두부부침이 있는 술상을 차려보라고 해야겠다. 혹시 아나. 그날의 연애 감정이 훅 올라올 수도 있지 않을까?

[윤혜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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