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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 견디며 매달린 남북 협상, 김일성은 열흘 만에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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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1948년 남북 협상에서

김일성에 농락당한 김구

1986년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에서 제작된 영화 ‘위대한 품’의 한 장면. 김구가 김일성에게 임시정부 인장을 바치려 했지만 김일성이 사양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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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소총회에 남한 단독 선거 문제가 회부되자, 김구는 김일성과 직접 협상해서 분단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8년 2월 16일 김구는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 정치 지도자 간 통일 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하자”는 소위 ‘4김 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비밀리에 보냈다. 그로부터 40일 가까이 지난 3월 25일 평양방송은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 회담’을 제의한다고 발표했다. 이틀 후 ‘거물 대남 공작원’ 성시백을 통해 김구‧김규식에게 지극히 사무적이고 고압적인 문체의 ‘초청 서한’이 전달되었다.

“당신들은 모스크바 3상 결정과 미소공위를 적극적으로 반대해 거듭 파열시켰습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미소 양군이 철거하고 조선 문제 해결을 조선인 자체의 힘에 맡기자는 소련 대표의 제의를 노골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조선에 대한 유엔총회의 결정과 유엔위원단의 입국을 환영했습니다. 이제야 당신들은 조선 국토의 분단, 조선 민족의 분열을 책동하는 유엔위원단과 미군사령관의 음모를 간파한 듯합니다.”

이렇듯 김구‧김규식을 준엄하게 꾸짖은 김일성은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를 소집하겠으니 참석할 의사가 있으면 3월 말까지 통지하라고 덧붙였다. 김구로서는 원문을 공개할 수 없을 정도로 모멸스러운 서한이었다. 그럼에도 3월 31일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가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독당 환송연에서 김구는 “외국인이 나를 그처럼 모욕했다면 단연 거부했겠지만, 동족인 만큼 최후의 담판을 하자고 한 것”이라고 했다. 평양행을 만류하는 둘째 아들 김신에게는 “빨갱이들도 피와 뼈를 같이한 우리의 동포다. 동족끼리 마주 앉아 최후의 결정을 봐야겠다. 나는 38선을 베고 죽더라도 가야겠다”고 타일렀다.

조선일보

1948년 4월 19일 경교장 2층 베란다에서 방북을 저지하는 학생들에게 남북협상의 의의를 연설하는 김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4월 19일 경교장에는 김구의 평양 방문을 저지하기 위해 청년 학생 500여 명이 운집했다. 수행 비서가 자동차 시동을 걸자 학생들은 “선생님, 기어이 가시려거든 저희들을 죽이고 가십시오”라면서 자동차 앞에 드러누웠다. 자동차 타이어 바람까지 빼놓았다. 김구는 경교장 2층 베란다에 올라 학생들을 향해 꾸짖었다. “학생들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용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군의 행동은 어떠했나! 내가 장덕수 사건으로 억울하게 미군정 재판에 증인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제군들은 어째서 시위운동 한 번도 못했는가! (…) 너희들은 내가 함정에 빠져 갖은 억울한 욕을 다 보고 있을 때에는 낮잠만 자고 있다가, 내가 옳은 일을 해보려니 밤잠을 자지 않고 반대하니 도대체 뭣들이냐!” 김구는 뒷담을 넘어 경교장을 빠져나와 38선을 넘었다.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월경하는 김구 일행. 왼쪽부터 수행비서 선우진, 김구, 김구의 둘째 아들 김신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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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김규식은 김일성‧김두봉과 ‘4김 회담’을 원했지만, 소련과 북한 당국은 남한 인사와는 아무런 협의도 없이 남북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하는 ‘남북조선 제(諸)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를 조직했다. 둘째 날 사회를 맡은 주영하는 “항일 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참가자는 249명인데, 이들의 수감 기간을 합하면 879년 3개월에 달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규모가 컸던 만큼 의제를 깊이 있게 토론하는 회의가 아니라 주최 측이 작성한 시나리오대로 의안을 통과시키는 거수기 역할만 필요한 회의였다.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5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연석회의는 ‘전조선 정치 정세에 관한 결정서’ ‘남조선 단독 선거 반대 투쟁 전국위원회’ 결성 등 소련과 북한이 제안한 의제를 단 한 차례의 반대 토론도 없이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4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나는 연석회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들 계획대로 회의를 계속하라. 나는 단지 김일성을 만나러 왔다”며 연석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김일성과 김두봉의 거듭된 설득으로 김구는 5일 동안의 연석회의 일정 중 딱 한 번 3일 차 오후 회의에 참석해 축사했다. “현하에 있어서만 조국을 분열하고 민족을 멸망케 하는 단선 단정을 반대할 뿐 아니라,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방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단독 정부를 수립해서는 안 된다는 연설이었다. 북한 참가자들은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박수 한 번 치지 않았다. 머쓱해진 김구는 축사를 마치고 곧바로 퇴장했다.

조선일보

1948년 4월 2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축사하는 김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그렇다고 김일성이 김구를 박대한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은 김구의 방북 전 북한 곳곳에 붙여놓았던 “살인 강도단 두목 이승만‧김구를 타도하자” “김구는 김구(金狗·김강아지)다”라는 포스터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 “김구 선생 만세”라는 플래카드를 붙였다. 또한 김일성은 젊어서 김구와 혼인할 뻔했던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를 찾아내 평양 체류 기간 김구 곁에 머물며 안내하게 했다. 당시 안신호는 목사였던 남편과 사별한 후 진남포에 거주하고 있었다. 50여 년 만에 안신호와 상봉한 김구는 감개무량했고, 김일성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했다.

김구가 요구한 ‘4김 회담’과 ‘양자 회담’은 연석회의가 폐막한 후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김구는 김일성과의 담판에서 남북 모두 단독 정부를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고, 연백평야 송수(送水)와 남한 송전, 조만식 석방 및 서울 송환, 뤼순 안중근 묘소 국내 이장 등을 요구했다. 김일성은 김구의 요구 몇 가지를 들어주었다. 5월 4일 남한으로 돌아온 김구는 귀국 성명서에서 김일성에게 연백저수지 개방과 송전 지속, 북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 등을 방북 남북 협상의 주요한 성과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5‧10 총선거 이후 김일성은 5월 14일 남한으로 송전을 중지했고, 8월 25일 북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북한의 역사는 김구와 김일성의 회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크나큰 믿음을 받아안은 김구는 수령님께 북조선에 남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적들이 북에서 억류하였다고 요언(妖言)을 할 수 있으므로 남조선에 나가서 투쟁하다가 정 곤란하면 다시 돌아오겠으니 그때 여생을 보낼 수 있게 과수원이나 하나 주셨으면 한다고 하였다. (…) 김구는 위대한 수령님께 상해임시정부의 인장을 내놓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내놓은 인장을 그냥 가지고 가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는 인민대중의 두터운 신임이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시었다”

김일성이 과장해서 부풀렸음이 분명한 이 일화는 김정일의 지시로 제작한 영화 ‘위대한 품’(1986)에 ‘박제’되었다. 통일국가 수립을 향한 김구의 염원은 김일성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했다.

북한 영화 '위대한 품'(1986)의 한 장면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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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김학준, ‘북한의 역사 2’, 서울대출판부, 2008

류석춘,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 2’, 북앤피플, 2024

박병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 2010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조선뉴스프레스, 2015

신복룡, ‘해방정국의 풍경’, 중앙북스, 2024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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