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체포영장 집행을 중단한 지난 3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 관저에서 나온 공수처 차량들이 윤 대통령 지지 집회 옆을 지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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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 | 여성현실연구소장
12월3일 이후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지만 이후 정치적으로 사실상 내전 중인 상황이 지속되면서 초유의 사태에 대한 무의미한 책임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전 나꼼수 멤버인 유튜버 김용민씨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촛불시민이 박근혜 정권 탄핵했는데 문재인 정권 들어서자마자 온갖 나치 짓을 하던 페미 때문에 문 정권 지지 기반 중 하나였던 이대남들이 등을 돌렸고 이를 이용한 이준석의 농간으로 정권이 윤석열에게 넘어갔다”는 주장을 펼쳤다. 지난 8일 입시 비리로 수감 중인 조국 전 대표는 오마이뉴스에 옥중편지를 보내 자신에 대한 과도한 수사에 침묵하거나 동조했던 범민주진보진영 인사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함께 윤석열 정부의 탄생을 심상정의 탓으로 돌렸다. 평소에는 소수파라는 이유로 뒤로 밀려나 있다가 이렇게 책임론이 불거질 때는 엄청난 권력이라도 가진 것처럼 취급한다. 왜 이러는 걸까. 책임이란 모름지기 더 많은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더 무겁게 물어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런 평가는 어떤가. 이명박 정부의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다름 아닌 진영 유튜버들의 힘을 과신한 결과였다. 김용민은 2012년 총선에 나섰다가 이명박 정부의 낮은 지지율이라는 조건이 만들어낸 다 된 밥에 노인 비하 등 ‘막말’ 파동이라는 진흙탕을 끼얹었다. 특수부 검사 윤석열에게 별의 순간을 안겨준 건 문재인 전 대통령과 조국 전 대표다. 윤석열이 대선에서 승리한 이유는 민주당 후보인 이재명 캠프의 선거운동 전략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부동층이었던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다소 늦게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 아슬아슬한 패배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런 가정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해봤자 탄핵 정국에서 만들어진 공통의 목표가 흐려지고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만 강해질 뿐이다. 윤석열은 아직 체포되지도 않았는데 누가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켰는지 공방을 벌이고 있을 때인가 싶다.
윤석열은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군사력을 앞세운 독재자가 되고자 했다. 그는 소통은커녕 오직 지배하고자 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문재인도 이재명도 심상정도 아니라 오직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를 누가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최근 탄핵반대 시위대에 10대 남성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페미 척결을 외치는 신남성연대가 마련한 연단에 올라 ‘멸공!’이라고 경례하며 서로의 동질감을 확인한다. 놀랍지는 않다. 이미 10년 전인 2015년에 17살의 김군이 페미니스트를 증오한다면서 국제테러단체인 이슬람국가(IS)에 가입하고자 밀입국을 시도한 바 있었다. 혐오와 배제를 바탕에 둔 극우의 망상적 세계관은 힘에 의한 지배를 꿈꾼다. 이들은 북한과의 전쟁을 도발하고 군사작전에 투입된 화기의 종류와 특수부대의 성격을 토론하며 모의 전쟁을 시뮬레이션한다.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확산하면서 계엄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2013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학교’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인물은 장나라가 분한 기간제 교사 정인재 선생이었다. 선생은 자신보다 훨씬 키 크고 힘센 학생들에게 “사회에 나가 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별로 없어”라는 말을 몇번이고 전한다. 소위 일진이라든가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된 학생들에게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의 논리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간 사회의 모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한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윤석열은 포고령을 통해 힘에 의한 지배를 선언하고자 했다. 이 행위에 대한 정확한 책임을 물어야 민주주의 사회에서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별로 없다는 걸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힘을 통한 지배가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맞서는 방법은 힘을 한곳으로 모아주고 나머지를 다 조용히 시키는 방식, 즉 양당 중심의 선거로 축소된 대의제에 의존하는 ‘약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열린 광장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결하는 ‘강한’ 민주주의다. 그렇게 각자 모두 다른 존재로 서로를 지켜내고, 힘에 의한 지배를 믿은 이들에게 정확한 책임을 묻자. 이 시간 동안 우리가 겨우 길어낸 희망을 불필요한 책임 공방에 낭비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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